아이에게 생일 기념으로 오페라를 볼까, 미술관에 갈까 물었더니 미술관이 더 좋다고 했다. 아이는 그라운드시소 서촌에서 하는 <워너 브롱크호스트> 전시를 보고 싶어 했다. 예전에 이곳에서 본 <문도멘도 : 판타스틱 시티 라이프> 전시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아직도 아이방 문에는 그 포스터가 붙어 있다.
<워너 브롱크호스트> 전시는 혼자였다면 보러 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일러스트 스타일 그림보다는 클래식한 그림이 좋다. 그래도 ‘온 세상이 캔버스’라는 전시의 부제가 마음에 들고, 전시 장소인 그라운드시소 서촌의 힙한 분위기가 좋아 기분 좋게 갔다.
워너 브롱크호스트의 작품은 캔버스에 물감을 발라 질감을 나타낸 뒤 그 위에 굉장히 얇은 붓으로 세밀하게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다. 아이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쓱쓱 대충 그리는 법이 없었고, 오랜 시간 한 자리에 앉아 아주 자세히 디테일이 살아있는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들을 보면 아이 마음속 끝없는 세계를 느낄 수 있었다.
워너 브롱크호스트는 호주에서 활동하는 젊은 현대 미술 작가로 주로 평범한 일상의 소중한 순간들을 그린다. 그의 작품에는 가족이 함께 하는 모습이 많고,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 웃음과 자유로움, 희망을 담고 있다. 내가 영국과 호주에 머물렀을 때 그 나라의 가족친화적인 문화가 인상 깊었는데 그의 작품에서도 그 문화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스키, 수영, 테니스 등 스포츠를 소재로 한 그림도 많았다. 인터뷰 영상을 보니 작가의 엄마가 어릴 때 그에게 모든 스포츠를 경험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작가 엄마의 교육 방식에 공감이 되었다. 나도 스포츠 활동을 중요시 여겨 아이에게 꾸준히 배우게 하고 있다. 스포츠를 시켜보니 단순히 운동 능력이 향상되는 걸 떠나 협동, 유대, 끈기, 노력, 용기, 도전 등 살아가는데 필요한 가치들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는 점이 너무 좋다.
전시에서 책 읽는 모습이 많이 등장해서 반가웠다.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놓고 사랑하는 사람과 나란히 책을 읽거나 바닷가에 누워 수영복 차림으로 편안히 책장을 넘기는 모습은 나에게 평온함을 준다.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책 읽는 누군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행복하다.
전시 마지막에는 엽서에 자신을 상징하는 그림 스티커를 붙여 나만의 작품을 만드는 코너가 있었다. 각자 만든 후 아이와 작품을 비교해보니 우리 둘 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걷는 그림을 가운데에 넣었다.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함께한다는 것’은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뮤지엄 샵에서 아이와 나는 따로 구경을 했는데, 계산할 때 보니 똑같은 엽서를 고른 것을 알았다. 마크 로스크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으로 연두색 코트에서 테니스를 치는 모습이 담긴 그림이었다. 그걸 보고 나는 작년 테니스를 열심히 배웠던 아이 모습을 떠올렸다. 학원에 몇 번 따라가 아이가 치는 모습을 봤을 때 정말 늠름하고 멋있어 보였던 기억이 났다.
이번 생일 선물로 아이에게 하루 공부 면제 쿠폰을 줬다. 아이는 주먹을 불끈 쥐고 흔들어대며 “진짜 마음에 드는 선물”이라고 했다. 공부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이 아이에게 가장 큰 기쁨인 듯하다.
전시를 본 후 저녁 식사를 할 때 아이가 마음에 들어했던 마크 로스코 테니스 그림을 액자에 담아 내밀었다. “해피버스데이” 이 세상에 태어나줘서 고맙다는 엄마의 마음을 한번 더 전하고 싶었다. 온 세상을 캔버스 삼아 삶의 소중한 순간들을 담은 너의 그림을 그려나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