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는 정말 특이해.”
유치원 다닐 때부터 매일 자막 없이 영어 영상을 즐겨 보는 아이를 두고 주변에서는 신기하다는 듯 말했습니다. 그 당시 아이가 떼쓰거나 고집부릴 때 아이를 일으키는 말은 “너 그럼 오늘 DVD 볼 수 없어.”라는 말이었어요. 그만큼 영어 DVD 시청은 아이에게 포기할 수 없는 즐거움이었습니다.
지난 연재에서는 ‘영어 영상을 잘 보게 하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여러 가지 제안해 봤는데요. 이번에는 그에 이어 좀 더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방법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본인이 쉬고 싶을 때 우리말 만화나 게임, 예능 콘텐츠가 아닌 영어 DVD를 스스로 꺼내 보는 아이는 이렇게 키웠습니다.
[비결 1] 시각보다 청각
첫째, 4세까지는 영상 노출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영어 영상을 그토록 재밌어하며 몰입하며 볼 수 있었던 건 결정적으로 영상 노출 경험이 극히 적었던 0~4세 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5세부터 영어 영상 노출을 차츰 시작했는데요. 그전까지는 아이에게 가능한 영상 자체를 보여주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때는 ‘책 읽어주기’와 ‘바깥놀이’ 중심으로 육아를 하면서 영상에 대한 아이의 관심과 흥미를 최대한 아껴두었습니다.
저는 사실 처음부터 영어 노출을 목적으로 영유아 시기에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던 건 아닙니다. 수많은 육아서를 탐독하고 학교 현장에서 오랫동안 아이들을 가르쳐본 경험을 바탕으로 갖게 된 확실한 믿음 하나가 있습니다. 육아에서 영상을 배제하는 것만으로도 그 어떤 비싼 교육기관에서도 쉽게 발달시켜 줄 수 없는 ‘생각하는 힘’을 키워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아이가 가졌으면 하는 창의력, 문해력, 독서력, 학습능력은 바로 그 힘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저는 완벽하게 지키지는 못 해도 어떻게든 영상을 보여주지 않는 방향으로 가려고 애썼던 거고요.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거실 TV를 패브릭 커버로 덮어놓았습니다. 아이가 있을 때는 거의 TV를 틀지 않았고요. 대신 라디오를 켰습니다. 그때는 ‘굿모닝 FM 전현무입니다’, ‘장일범의 가정음악’, ‘정오의 희망곡 김신영입니다’, ‘Radio Swiss Classic(24시간 클래식 음악만 나오는 앱)’ 등 저만의 편성표가 있어서 늘 틀어놓았어요. 태교 때부터 들었던 <백창우의 음악태담>과 <최승호, 방시혁의 말놀이 동요집>, <놀이동요 : 인기 동요>, <전래동요 : 우리 겨레 우리 동요> 등도 많이 들었고요. 그렇다 보니 아이는 시각 미디어보다는 청각 미디어에 익숙해졌습니다. 이러한 생활 습관은 청각 능력 및 듣기에 대한 집중력을 발달시켜 이후에 영어로 영상 노출을 할 때도 주의 깊게 듣고 이해하려는 자세를 갖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봐요.
[비결 2] '영상=영어'로 인식하기
둘째, 영상 노출은 항상 영어로만 하였습니다. 영상을 보고 싶으면 무조건 영어로 보도록 했습니다. 아이가 외부에서 우리말 영상에 노출된 적은 있지만 가정에서 우리말 만화나 방송 등을 본 적은 드뭅니다. 아이는 영상을 처음부터 영어로만 봤기 때문에 특별히 거부나 반발 없이 그 규칙에 잘 따랐어요. 아이에게는 ‘영상=영어’라는 인식이 깊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하루는 묻더라고요.
“친구들은 우리말 영상을 보는데 왜 나는 영어로만 봐야 하는 거예요?”
“우리말 영상을 보기 시작하면 영어 영상을 멀리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 그렇게 되면 영상을 보면서 영어를 자연스럽게 배우는 게 어려워지니 학원에 다니거나 훈련식으로 배워야 할 거야.”
“저는 학원은 안 다니고 싶어요. 이게 나아요.”
그러면서 아이는 자기가 친구들과 다른 게 진짜 궁금해서 물어본 거라고 하더라고요.
영어 영상 시청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은 우리말 영상입니다. 우리말 영상에 많이 노출되면 영어 영상을 보기가 힘들어져요.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영상을 볼 때는 아무래도 좀 더 귀 기울여야 하고, 무슨 뜻인지 추측해야 하니 인지적으로 불편함을 느끼죠. 편하게 우리말 영상을 볼 때와는 달라 점점 보기 싫어집니다. 영어 영상을 잘 보기 위해서는 대체할 수 있는 영상이 있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가능한 우리말 영상을 차단하거나 최소화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이는 영상 보는 것이 아쉬워서라도 영어 영상을 찾게 될 거예요.
아이는 지금도 축구 중계방송, 스포츠 예능 ‘골 때리는 그녀들’, ‘뭉쳐야 찬다’ 외에는 우리말 영상을 잘 보지 않습니다. 이제는 제가 일부러 제한을 두지 않는데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더라고요. 계속 영상은 영어로만 봐와서 그것이 더 익숙하고 편한 듯해요.
이 글을 읽으면서 ‘이미 우리 아이는 우리말 영상에 많이 노출되었는데 어쩌지?’라는 고민이 드는 분도 있으실 텐데요. 그런 경우에는 규칙을 만들어 지금부터 방향을 조금씩 바꿔 가보세요. 예를 들어 우리말 영상을 보고 싶으면 영어 영상 먼저 보기, 우리말 영상 보는 시간 순차적으로 줄여나가기, 좋아하는 특정 프로그램만 우리말 영상으로 보기 등으로요. 규칙은 아이와 의논하여 정하고, 규칙을 지켰을 때는 그에 따른 보상을 해주시고요.
또한 이미 습관적으로 TV 노출이 많은 가정에는 TV 커버(가리개)를 추천합니다. 언제든 손쉽게 리모컨만 누르면 화면이 나오는 환경에서 영상을 절제하기란 쉽지 않아요. 평상시에는 TV를 커버로 덮어놓고 필요할 때만 영상을 시청하는 습관을 갖도록 해주세요. 가려져 있으면 확실히 관심이 덜하고요. TV를 보려면 커버를 벗겨야 하는 절차가 은근히 귀찮아 꼭 보고 싶을 때 아니면 잘 안 보게 됩니다.
제가 소개한 방법 두 가지 ‘4세까지는 영상 노출을 되도록 하지 않기’, ‘영상은 영어로만 보는 습관 갖기’는 결코 쉬운 방법은 아닙니다. 하지만 효과가 확실하고, 교육비와 수고를 아낄 수 있는 경제적인 방법이기도 해 꼭 추천하고 싶습니다.
제 아이가 특이해서 영어 영상을 잘 본 것이 아닙니다. 영상을 좀 늦게 보기 시작했고, 처음부터 영상을 영어로만 봐왔기 때문에 잘 보았던 거죠. 따라서 이런 환경만 조성해준다면 어떤 아이나 영어 영상을 잘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