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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의 대화 나의 노래 Jun 16. 2023

미술관의 마지막 관람객이 될 때까지

평온한 날이 올 거라는 믿음

토요일 늦은 점심 김치찌개와 돈가스를 배달 음식으로 시켜 먹고 침대에 누웠다. 핸드폰을 집어 들고 유튜브를 켜려다 이러면 또 하루가 허무하게 지나갈 것 같아 몸을 일으켰다. 얼른 찬물로 세수를 하고 집을 나섰다. 짙은 초록색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붉은 벽돌 담장 앞에서 서울로 가는 9401번 버스를 탔다.    

      

갤러리바톤으로 김보희 전시회를 보러 갔다. 3년 전 코로나가 한창일 때 금호미술관에서 열렸던 김보희 전시회를 놓쳐 두고두고 아쉬웠다. 인터넷이나 국립현대미술관 뮤지엄샵에서 봤던 그녀의 작품은 원초적인 자연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었고 생명력과 활기가 넘쳤다. 앙리 루소의 작품을 떠올리게 하면서. 살아있다는 느낌이 충만한 그림이었다. 더 이상 우울해지고 싶지 않은 날. 그녀의 그림이 보고 싶었다.  

        

이번 전시는 그녀가 머물고 있는 제주도의 풍경의 담은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초록과 파랑이 가득했다. 아이와 단둘이 딱 이맘때 제주에 간 적이 있다. 그때 하염없이 바라봤던 제주 바다의 푸르름이 내게 다시 밀려왔다. 고민을 한가득 안고 선 나에게 그거 별거 아니라고 말해주던 바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좋았던 작품은 블루바톤 공간 제일 앞쪽에 전시된 작품(15, towords)이다. 커다란 두 개의 캔버스를 위아래로 붙여 하늘과 바다를 담아낸 작품인데 맞은편 통창으로 햇빛이 들어와 캔버스 안 바다에서 일렁거렸다. 이 작품이 이곳에 걸려있지 않았다면, 오늘의 햇빛과 바람이 없었다면, 이렇게 찬란한 바다를 볼 수 없었겠지. 나는 작품 앞에 있는 흰색 벤치에 앉아 바다를 오래도록 바라봤다. 미술관의 마지막 관람객이 될 때까지. 내 안의 짙고 어두운 바다에도 윤슬이 생길 때까지.          


다음날 도서관에 갔는데 신착도서 코너에 김보희 그림산문집 <평온한 날>이 꽂혀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책을 바로 펼쳤다. 원화가 아닌 인쇄된 그림으로는 좀처럼 감응하기 힘든데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자 사방이 고요해지고 마음이 차분해졌다.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격랑을 겪고 품은 바다는 평온하다. 그 바다를 나는 그린다.’          

 

화가가 그리고자 하는 건 마냥 평온한 바다가 아니었다. 거센 파도를 품어내고 마침내 평온해진 바다였다. 그것이 아름답기에.           


요즘 나는 ‘삶은 나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걸까. 도대체 언제까지.’라는 생각을 놓지 못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일들이 내 삶을 구질구질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어떻게든 피하고, 지우고, 오려내고 싶었다. 그런데 그녀의 글과 그림을 보고 나니 생각이 조금 달라진다.           


그것들을 품어내야겠다고. 그렇다면 내 삶도 그녀가 그린 바다처럼 아름다워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나는 아직 내게도 평온한 날이 올 거라는 믿음을 져버리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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