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여행을 다시 가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는 테이트 모던 때문이다. 작년 겨울 아이와 여행사 패키지로 5개국 서유럽 여행을 갔었다. 그중 나는 영국을 가장 기대했고, 특히 테이트 모던은 꼭 가보고 싶었다. 테이트 모던은 화력발전소를 미술관으로 탈바꿈시켜 런던의 랜드마크가 된 곳으로 현대 예술의 최전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국 여행에서 테이트 모던 방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버스 창밖으로 멀리 떨어진 테이트 모던을 잠깐 본 게 전부였다. 가이드에게 항의했지만, '일정은 변경될 수 있으며, 내부 관람이라고 명시하지 않았다'라는 무책임한 답변만 돌아왔다. 그날 유명한 식당에서 피쉬앤칩스를 먹었지만 화가 나서 맛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유독 속상했던 건 여행 전 아이와 테이트 모던 책을 펼쳐놓고 “이거 꼭 보고 싶어.”, “이 작품 실제로 보면 너무 멋질 것 같아.”라며 설렘을 나눴던 대화가 모두 물거품이 된 점이다. 테이트 모던 관람이 좌절되자 여행 퍼즐의 한 조각이 빠져버린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실망감은 다시 영국으로 가야 한다는 열망으로 변해갔다.
여행 후 런던 지도를 주문해 식탁 옆에 붙여두고 김치찌개를 먹으면서도, 된장찌개를 먹으면서도 지도를 보며 테이트 모던을 꿈꿨다. 런던을 또 가게 되면 많은 지출이 있겠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돈 버는 게 아닐까? 지난 여행 때는 바쁜 남편은 두고 가게 돼 매우 아쉬웠다. 그런 생각을 하던 어느 날, 나는 덜컥 런던 히드로행 비행기표를 결제해버렸다.
올여름 우리 가족은 모두 함께 영국에 갔다. 테이트 모던을 가던 날, 남편은 미술관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좋지 않다며 숙소로 돌아가 쉬고 싶다는 눈치를 보였다. 사실 여행 중 남편은 사진 찍는 것에 줄곧 비협조적이었던 터라 그를 보내고 나니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덕분에 아이와 단둘이 테이트 모던 데이트를 하게 되는 특별한 시간이 만들어졌다.
우리는 먼저 테이트 모던 6층 카페로 가 점심을 먹었다. 여행을 가면 일반 식당보다는 미술관 내의 식당이나 카페를 선호한다. 대체로 분위기가 좋고 맛과 서비스도 상당 부분 보장이 되기 때문이다. 가격이 다소 높긴 했지만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이곳은 환상적인 뷰를 갖고 있었다. 새파란 하늘 아래 우아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세인트폴 성당과 유람선이 유유히 떠다니는 템스강이 통창 너머로 그림처럼 펼쳐진 가운데 로스트 치킨과 부라타 치즈를 먹었다. 아이는 아름다운 풍경과 근사한 공간에 예술적 감성이 자극되었는지 공책을 꺼내 세인트폴 성당을 그렸다. 스케치하며 정교한 바로크 양식 문양에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다.
테이트 모던에는 팝아트를 좋아하는 아이 취향의 작품이 많았다. 리히텐슈타인, 앤디 워홀, 게릴라 걸스의 작품 등이 아이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아이에게는 만화나 광고, 포스터 같은 작품들이 클래식한 유화보다 훨씬 더 재밌는 듯했다. 특히 게릴라 걸스 작품의 도발적인 문구에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반응하는 아이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미술관에서는 마침 <표현주의자들 : 칸딘스키, 뮌터 그리고 청기사>라는 특별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아이는 일곱 살 때 세종문화회관에서 칸딘스키 전시를 본 후로 좋아하는 화가를 물으면 주저없이 칸딘스키를 꼽는다. 그의 그림을 보면 상상력이 생기고 음악이 흐르는 것 같다고 한다. 상설 전시는 무료인 반면, 특별 전시는 1인당 3만원 정도의 관람료를 별도로 내야 했지만 그 가치는 충분해 보였다.
칸딘스키의 작품은 기하학적인 도형을 활용한 추상화뿐만 아니라 사실적인 풍경화나 인물화를 다룬 작품도 많아 그의 작품 세계를 다양하게 볼 수 있었다. 선이 굵고 차가워 보이는 그의 그림에서는 어쩐지 러시아의 분위기가 묻어나 작품 속에서 작가가 태어난 나라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것이 흥미로웠다. 아이는 마지막 전시실에 있었던 무지개가 그려진 <Cossacks>를 제일 좋아했다. 칸딘스키 작품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꼽히는 이 작품을 골라낸 아이의 안목이 새삼 놀라웠다.
전시 제목 속에 포함된 ‘뮌터’라는 작가 이름이 생소했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칸딘스키의 연인으로 주로 알려져 있으나 칸딘스키와 동등하게 표현주의와 추상 미술을 이끈 예술가였다. 그녀에게서 로댕에게 가려진 카미유 클로델이 보였다. 풍월당에서 나온 뮌터의 생애를 다룬 책이 있던데 사서 볼 생각이다.
전시에서 작품이 유독 마음에 들어 캡션을 확인하면 대부분이 프란츠 마르크 작품이었다. <Girl with toddler>와 <Deer in the snow>는 집에 걸어두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그의 작품은 원초적이면서도 순수하고 희망적인 느낌이 들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름만 알고 있었던 마르크란 화가를 재조명하게 되었고 덕분에 좋아하는 화가가 또 한 명 늘었다.
테이트 모던을 충분히 즐겼지만 여전히 아쉬움은 남았다. 남편과 함께하지 못했기에 다음엔 가족 모두가 함께 미술관을 거닐고, 6층 카페에서 멋진 식사를 하며 온전히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 아이는 테이트 모던 앞 템스강가에서 먹었던 블랙베리 아이스크림 맛을 잊을 수 없어 또 가고 싶다고 한다. 나 역시 영국이 자꾸만 그립다. 테이트 모던을 시작으로 이어지는 이 마음은 나를 영국으로 다시 불러들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