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위키드를 보다

함께 써 내려가는 이야기

지난 토요일 아침 아이와 영화 <위키드>를 보러 갔다. 차 안 라디오에서 마침 ‘BBC 프롬스’ 공연 실황 음악이 흘러나왔다. 음악을 듣자 올여름 영국에서 프롬스 음악 축제에 가고, 위키드 뮤지컬을 봤던 기억이 떠오르며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위키드 뮤지컬의 여운을 이어가고 싶어 영화를 보러 가는 길에 우연히 프롬스 음악까지 듣게 된 주말 아침, 마치 영국에서의 추억을 잊지 말라는 다정한 메시지를 받은 기분이었다.


여행 전 우리 가족은 각자 영국에서 꼭 하고 싶은 일을 꼽아봤다. 아이와 남편은 ‘웨스트엔드에서 뮤지컬 보기’를 골랐다. 우리는 여러 뮤지컬 중 아이가 가장 보고 싶어한 위키드를 보러 가기로 했다. 나는 인터넷으로 R석 티켓 세 장을 예매했다.


우리는 런던 아폴로 빅토리아 극장에서 뮤지컬 <위키드>를 관람했다. 사실 나는 이 작품에 대해 초록 마녀가 그려진 포스터와 오즈의 마법사를 각색한 작품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화려하고 압도적인 무대는 순식간에 나를 다른 세계로 이끌었고,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노래는 티켓값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영어 대사를 잘 이해하지 못해 공연이 아주 재미있지는 않았다. 몇 번 시계를 들여다보곤 했다.


반면 아이는 공연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영어를 좋아했던 아이는 대부분의 대사를 이해했고, 유머가 나올 때마다 현지 관객들과 같이 깔깔댔다. 인터미션 때는 내가 이해하지 못한 내용을 자세히 설명해주기도 했다. 뮤지컬의 감동도 있었지만 나를 더 즐겁게 한 건 오리지널 영국 공연을 행복한 표정으로 온전히 즐기던 아이의 모습이었다. 아이의 세계가 점점 넓어지는 것을 보는 기쁨은 무대의 감동 이상이었다.


하지만 그날 여행이 마냥 완벽했던 건 아니다. 공연 전 우리는 영국 자연사 박물관을 관람한 뒤 저녁을 먹으러 해롯 백화점에 들렀다. 푸드코트 같은 곳이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메뉴는 몇 개 되지 않았고 가격은 터무니없이 비쌌다. 결국 식품 코너에서 꼬치와 치킨 다리를 사서 공원에서 먹기로 했다.


문제는 공원을 찾는 일이었다. 남편은 구글맵에 검색어를 입력하지 않고 대충 지도를 살펴보더니 이 근처에 공원이 많다고 하며 따라오라고 했다. 하지만 곧 나온다던 공원은 보이지 않았고 결국 도착한 곳은 문이 굳게 닫힌 사유지 공원이었다. 나는 다시 지도 검색을 제대로 하자고 했지만 남편은 조금 더 가면 또 공원이 있다며 앞장섰다. 다리는 아프고 꼬치와 치킨은 점점 식어갔다. 두 번째로 도착한 공원 역시 사유지였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도대체 언제까지 갈거야?”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남편은 “어떡하라고!”라며 되레 화를 내더니 혼자 걸어가 버렸다.


남편은 금세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아이와 나는 너무 배가 고파 길가 벤치에 앉아 꼬치를 먹었다. 백화점에서 15,000원을 주고 산 꼬치는 한국 길거리에서 3,000원에 파는 것보다 훨씬 맛없었다. 여러모로 화가 났다.


시간은 흘러 공연장에 가야 했다. 남편은 공연장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고 티켓도 없었다. 화가 나서 아무 연락도 하지 말까 고민했으나 그렇게 되면 티켓값도 아깝고 여행을 망칠 것 같아 공연장 주소와 모바일 티켓을 문자로 보냈다.


빅토리아 극장은 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아이와 나는 먼저 자리에 앉았다. 남편이 걱정되기보다는 괘씸한 마음이 더 컸다. 그런데 아이는 달랐다. 아빠가 제대로 찾아올 수 있을지 걱정하며 계속 공연장 출입문 쪽을 돌아봤다. 결국 남편이 극장에 들어서자 아이는 안도했다. 나는 남편에게 뭐라 하지 않았다. 남편 또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행동했다. 여전히 화가 나고 서운한 마음이 남아 있었지만 다 같이 보게 되었으니 '괜찮다'고 생각하며 감정을 덮어버렸다. 부부 사이에는 그런 순간들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무사히 뮤지컬을 관람했다. 공연이 끝났을 때에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남편이 있으니 무섭지 않고 든든했다.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며 우리는 뮤지컬에서 좋았던 캐릭터, 기억에 남는 장면, 느낀 점 등을 이야기 나눴다. 그 대화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세상엔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도 없는 것 같아. 중요한 건 가능한 선을 늘리고 악을 줄이는 방향으로 가는 거겠지.”

런던의 이층 버스 창밖으로 보이던 도시의 불빛과 함께 나누던 이 대화는 내게 오래 남았다.


여행 중 다툼이 있었지만 결국 따뜻한 마음으로 마무리했던 그 날을 떠올린다. 처음엔 가족 간의 갈등이 싫고 남편과 내가 맞지 않는 것 같아 괴로웠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행복한 가족은 완벽한 조화를 이룬 모습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맞춰가는 과정이라는 걸.


나에게 <위키드>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나아가는 우리를 되돌아보게 해준 이야기이다. 엘파바처럼 두려움을 뚫고 나아가며, 글린다처럼 손을 내밀며, 우리는 지금도 불완전하지만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함께 써 내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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