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동시대를 바라보는 독자적 관점이 필요한 이유

아트 캐피털리즘 by 이승현

by 해인

오늘도 미술관 앞에서 인증샷을 찍고 작품과 나란히 서서 포즈를 취하는 관람객들에게 동시대 예술이란 과연 무엇일까?


나 역시 20여 년 전 첫 해외여행길에 오르며 정한 투두 리스트는 도판에서만 보던 작품들을 실물 영접하는 것. 미술관 개관 시간 전에 도착해서 폐장할 때까지 밑창 두꺼운 운동화에 의지해 샅샅이 읽고 감상하고 느끼고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몇백만 원 하는 비행기 값을 치르고 와서야 보는 작품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버스비나 전철비를 내면 볼 수 있는 그림이라는 게 마냥 부러웠다. 높다란 천고 끝까지 솟아있는 그림의 스케일에 감동하고 소름 돋는 전율에 예술적 가치를 체험했다고 자부했다.


근데 말입니다.


천편일률적인 유럽의 성당들은 금방 물렸고, 구대륙이나 신대륙이나 할 것 없이 집착하는 그리스, 이집트 유물들을 보면서 이들이 가진 결핍감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왜 '우리는' (그들이 말하는 주변부, 또는 민속학적 가치를 가질 뿐인 indigenous) 왜 그리스 철학과 르네상스 미술과 인상주의 작품에 열광할까? 왜 열광해야만 할까? 도대체 앤디 워홀은 왜 그리 비싸고, 포르말린에 담긴 상어는 대체 또 뭘까? 투전판이 되어버린 미술시장에서 도대체 내가 감응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예술의 경계는 무엇이고, '더' 가치 있는 예술이란 과연 무엇인가? 무수한 질문들이 닥쳐 들었다.


이리저리 뒤져봐도 이런 궁금증을 해소해 줄 책을 찾긴 어려웠다. 자기 딸내미에게 알기 쉽게 예술 이야기를 풀어 설명해줄 요량으로 쓴 책은 어느 순간 전 세계 교양서가 되어 있었지만 그 책에서 그리스보다 훨씬 오래된 메소포타미아 예술의 흔적을 찾긴 어려웠고, 더구나 동아시아 미술은 거의 통편집되다시피 했다. 여기저기 유럽 미술관들을 직접 발로 찾아다녔다며 나온 책들은 다분히 인상적이고 주관적인 감상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해한다. 예술을 말과 글로 풀어내는 것은 동시대 철학과 과학, 인식학과 세계관을 모두 넘나드는 일임을. 그리하여 공부하고 탐구해야 할 영역이 무한에 가까운 일임을. 말과 글로써만 아니라 그런 자세를 유지하며 삶을 유지하는 혹은 실천하는 태도를 갖는 것은 더욱더 어려운 일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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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캐피털리즘>은 한 권의 책에서 담기 힘든 이야기를 최대한 친절하게 그리고 저자 스스로 벅차지 않을 정도로 풀어낸다. 경제학을 공부하고 금융 쪽에서 일을 하다가 뒤늦게 미술사를 공부하고 강의하는 사람으로서 '기축통화'로 군림하게 된 서양 미술작품을 시장의 변화와 발전이란 렌즈로 조명한다. 우리가 선망해 마지않는 고전작품들과 지금 현재 가장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는 작품들의 탄생이 결국 끊임없는 주도권 싸움의 결과였다는 것. 길드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작가들이 만든 아카데미, 권력기구로서의 아카데미에 반대해 대중에서 작품을 선보이는 창구로서의 살롱, 살롱에서 차별화를 원했던 화상들과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갖춘 기업가적인 화상의 출현은 16세기 증권거래소가 가장 먼저 생긴 네덜란드라는 시장의 출현, 그리고 당시 구매력을 갖추게 된 시민계층과 그들에게 생계를 의지해야 하는 화가들과 당시의 화풍이 연결되며, 2차 세계대전 이후 파리가 가진 주도권을 뉴욕으로 가지고 오기 위해 바르비종파와 인상파를 성공적으로 소개한 화상들의 역할, 그들의 새로운 신화창조(추상표현주의)가 모두 궤를 같이 한다.


결국 어느 시대가 어떤 그림을 좋아하느냐는 그 시대가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느냐, 그 시대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이냐, 우리가 어떤 사람이냐를 드러내 주는 거울 같은 것이다.


예술사에서 논하는 가치와 상관없이 나는 여전히 잭슨 폴락과 장 뒤뷔페, 호안 미로 등을 좋아한다. 폴락의 그림을 보기 전에 <폴락>이란 영화라 감상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며, 벽 하나를 가득 메운 스케일에 압도당했을 공산이 크다. 베르그송과 바슐라르를 좋아하는 성향이 뒤뷔페의 그림에 친숙함을 느끼게 했을 것이며 삶과 예술의 일치, 또는 예술을 통한 삶의 전복을 꿈꾸는 성향이 앵포르멜, 아방가르드적인 작품들에 끌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던 초등학교 때 난 장욱진을 좋아했다. 달력에 인쇄된 장욱진의 열두 달 그림을 보고 또 보았다. 그리고 커서 장욱진이 전시를 하면 회사에 휴가계를 내고 하루를 온전히 그에게 헌납했다. 장욱진이 박수근, 김환기 등과 함께 앵포르멜을 대표하는 한국 작가라는 것은 뒤늦게 알았다. 내가 또 넋을 놓고 바라보는 것 중 하나는 불국사에 있는 담벼락이다. 경주 남산에 지천으로 깔린 석불과 석상들이다. 김근태의 그림을 보고 석굴암에 있는 거친 화강암을 떠올렸다. 작가가 파리에 가서 그 이전까지 작업한 것을 모두 버리고 '나'를 발견하는 과정으로서 찾아낸 석굴암의 질감 이야기는 나중에 들어 알았다. 내가 끌리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라는 게 아니라 내가 끌리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유전자와 상관이 있으며 그건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나라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탈색을 해도 유러피안이 될 수 없고, 아무리 혀를 굴려도 아메리칸이 될 수 없다. 나는 한국어로 된 글을 읽을 때보다 영어로 된 문건을 찾아 읽어야 할 때가 더 많지만 그렇다고 영어가 한국어보다 나은 언어라고 생각하거나 글은 반드시 한국어로 써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한국어로 글을 쓸 때와 영어로 글을 쓸 때는 생각의 속도나 접근 방법이 조금씩 달라 그 차이를 온전히 음미하고자 한다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한국어로 된 것보다 영어로 쓰인 것들이 내용이 더 다채롭고 깊이가 있는 것들이 많은 게 사실이다. 영어라는 인터내셔널 랭귀지가 포섭한 지적 세계가 워낙 방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어로 말하고 써야만 지적이고, 한국어로 읽고 쓰면 로컬에 머물 뿐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동시대를 바라보는 독자적인 관점.


저자가 책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했던 이야기는 바로 그것이다. 거대한 자본이 작가 발굴은 물론 가치를 정하고, 가격을 높인 후 다시 되팔 수 있는 미술시장에서, 물질과 비물질이, 인간과 비인간이 사유와 존재를 재고하는 작금의 인식에서, 가상과 현실이 혼재하며 '돈'이 유일한 가치를 점령하는 상황에서, 인류세가 마지막 단말마를 처절하게 내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비관적인 전망이 세를 더해가는 상황에서, 냉정하게 시장을 직시하고, 허구적 신화에 휘둘리지 않으며, 진짜 내 이야기를 하고 들을 수 있는 예술의 가능성에 대하여.


진부하긴 하지만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가 작금의 지구 유린 사태를 초래했다는 것에는 동서양 사상가들이 공히 인정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서술, 새로운 관점, 새로운 전복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그리스 이후 서양의 회화가 모사에 전통을 두고 있다면, 동아시아는 아바타가 산수를 유람하는 작가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심상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오늘날 메타버스는 뒤늦은 동아시아 회화의 도래인가? 우리나라에 모더니즘은 없었고 모더니즘의 이식만이 있었을 뿐이라는 인식은 살아있는 데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처럼 해괴하다.


써라.

써야 한다.


그들보다 훨씬 더 오래된 회화적 전통이 있는 곳에서, 누구보다 먼저 메타버스로 향한 돌진이 뚜렷한 이곳에서, 격변의 역사를 통해 개개인이 모두 사연과 집단적 트라우마를 겪은 여기에서, 읽고 쓰고 그리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주눅 들지 않고 펼쳐져야 한다. 어쩌면 그들은 세계를 왜곡하는 그들의 인식으로 말미암아 스토리 텔러라는 호모 사피엔스의 특징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기축통화국과 '내가 제일 잘났다'라는 사상을 굳건히 하지 않았던가? 전 지구적 감염병이 더욱 잦게 찾아오는 인류세의 미래는 그간의 과오를 반성하고 새로운 인식과 태도를 요구한다. 과거의 패턴으로 미래를 전망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상상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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