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실종을 선택한 세기의 작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by 밀란 쿤데라

by 해인

“쿤데라가 아직 살아있나?”


“글쎄, 죽었다는 소식 못 들었는데?”


“거의 죽을 때 넘지 않았나?”


“죽었는데 이렇게 조용할 리가!”



밀란 쿤데라의 생몰이 궁금해졌다. 갑자기.


위키에는 1929년생(93세)으로 적혀있다. 생몰연도 앞에는 물결무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공식적인 죽음이 확인되지 않았다. ‘자발적 실종’을 선택한 작가의 선택은 죽음의 소식을 포함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을까. 한때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읽히는 작가 중 하나였던 그가 파리에 정착한 후 자신이 태어난 나라 체코로부터 버림 당하고, 노벨상 위원회로부터도 외면당하고, 모국어로 쓴 글은 더 이상 읽히지 않는 작가가 된 노작가의 생은 ‘어느 다른 곳에’ 있을까. 프랑스의 언론인 아리안 슈맹은 <밀란 쿤데라를 찾아서>에서 ‘자발적 실종’을 택한 밀란 쿤데라에게 ‘사생활’이 갖는 의미가 얼마나 절박한 것인지 밝혀낸다.



작가의 삶과 작품


작품을 이야기할 때 작가를 둘러싼 이야기는 얼마나 작용하는 것이 마땅한가? 작품을 읽다 보면 작가에게 드는 궁금증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 작가에 대한 이해와 설명을 완벽히 차단한 채 작품 자체에만 몰두하여 감상하는 것은 과연 온당한가? 작가의 삶과 연관 지어 작품을 해석하려는 환원주의적 태도는 얼마나 위험에 빠지기 쉬운가? 죽거나 혹은 살아있더라도 제한적인 정보밖에 접근할 수 없는 작가의 경우 작품과 작가의 공백 사이를 메우는 우리의 상상력은 얼마나 쉽게 비약과 환원주의를 쉽게 넘나들게 되는가? 일단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들에 대해 우리는 결국 ‘우리식’ 대로 읽어낼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우리가 한 작품을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도대체 얼마나 알아야 할까?


읽은 지 이십 년도 훌쩍 넘은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문득 생각 나 충동적으로 영문본(‘원서’라고 할 수 없는 영어번역본, 그는 파리에 정착한 후 오직 저자가 재검토한 텍스트만이 체코어 원전과 같은 가치를 가진다, 고 선언했다.)을 집어 들었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시작한 소설은 환희와 경탄으로 시작해 호기심과 궁금증이 증폭되더니 혼란과 유보의 감정을 거쳐 회환과 쓸쓸함, 그리고 아련함과 경의로 되돌아왔다. 그가 발표한 소설을 거의 다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익숙한 소설은 낯서리만치 새로웠고, 새롭다가 지루해질 정도의 익숙함에 놀라고, 마침내 경탄으로 마무리되었다. 테레사를 지독히 사랑하면서도 다른 여자와의 성관계를 끊을 수 없었던 토마스의 모순처럼, 쿤데라에 대한 나의 태도도 모순되긴 마찬가지였다.



무거움과 가벼움, 소설의 시작


메타 픽션의 형태를 취하는 이 소설은 철학자들을 당혹하게 했던 니체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모든 일이 계속해서 반복해서 일어난다면 우리는 영원에 못 박히는 것(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듯이)이라는 작가의 이야기는 니체의 영겁회귀가 갖는 무거움에 대한 비유다. 니체부터 파르메니데스, 베토벤까지 소환하는 소설의 도입부는 90년대를 풍미했던 지적인 소설의 전형처럼 보인다. ‘자신의 자아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권력의지의 가장 그로테스크한 버전’이라고 했던 그는 자전적 이야기에 반대하며 철학과 사색, 이야기가 버무려진, 당시 소설로는 미개척지를 열어젖힌 인물이다. 영어로 중역된 소설은 원전이 가진 복잡 미묘함을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게 만든 결과인지, 애초부터 선명하게 철학적으로 접근하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인지 분명치는 않다. 프랑스 독자들을 당혹하게 했던 ‘바로크풍의 문체’에서 ‘간결한 문체’로 전환하게 된 이유가 전적으로 번역자의 과잉 개입에 의한 해프닝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The idea of eternal return is a mysterious one, and Nietzche has often perplexed other philosophers with it: to think that everything recurs as we once experienced it, and that the recurrence itself recurs ad infinitum!


순간들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우리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 한 번, 반복되지 않는 우연들의 연속이라면? 그 가벼움은 참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토마스는 대략 여섯 번 정도의 우연이 맞물려 만난 지 한 시간밖에 되지 않는 테레사를 사랑하게 되고 만다. (사랑? 그녀가 없으면 죽을 것 같은 느낌을 사랑이라고 불러도 된다면. 토마스는 그조차 조금 과장된 감정이라는 걸 인정하기도 하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일은 그의 삶의 원칙 중 중요한 것들을 위반하는 일이다. 가령 누군가와 침대를 공유하지 않는 일이라든지, 자신의 삶의 자유를 속박하는 관계를 지속하지 않는 일이라든지 하는.


테레사와 함께하는 게 좋았을까? 아니면 혼자 남는 게 나았을까?
Was it better to be with Tereza or to remain alone?


이 소설은 토마스가 창문 너머 풍경을 바라보며 들었던 이 생각을 밝혀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과연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한 걸까? 그 사람을 사랑했다면 그 곁에 남는 게 나았을까?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었다(In spite of their love, they had made each other’s life a hell). 토마스는 강하고 테레사는 약했다고 하지만 토마스가 스위스에서의 안전한 삶을 버리고 소련이 침공한 프라하로 돌아오게 만들고, 의사가 아닌 유리창 닦는 일을 하고,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의 삶을 살게 한 건 결국 테레사다. 테레사는 무겁고, 사비나는 한없이 가벼웠지만 결국 토마스를 지상에 발붙이게 한 것도 테레사다. 테레사는 날마다 머리카락에서 다른 여자의 사타구니 냄새를 풍기며 돌아오는 토마스로 인해 절망하지만 토마스를 떠나는 일은 그녀에게 너무나 버거운 일이다. 설명하기 어려운 거대한 모순을 감당하며 두 사람이 엮어내는 이야기를 통해 쿤데라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다시, 작가의 삶으로


천박한 상상력일지 모르겠으나 아리안 슈맹의 <밀란 쿤데라를 찾아서>를 보면 밀란 쿤데라와 아내 베라 쿤데라는 작품 속 토마스, 테레사와 겹쳐진다. 50년 이상을 함께한 두 부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영혼의 분신 같은 존재다. 베라 쿤데라도 레스토랑에서 일을 했고, 테레사도 그랬다. 테레사만큼이나 베라의 미모도 뛰어나다. 토마스만큼이나 쿤데라는 지적이고 명철하다. ‘우리의 유일한 불멸은 비밀경찰의 문서 자료 속에 있다 <웃음과 망각의 책>’고 했던 것처럼 쿤데라는 평생 도청과 감시에 시달렸다. 75년부터 베라와 함께 프랑스에 거주하고, 81년 시민권을 획득한 사실은 널리 알려졌지만, 체코 정부로부터 국적을 박탈당하고, 2019년에 다시 체코 국적을 획득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콧대 높은 프랑스 문화 권력들과 늘 거리를 유지하면서 지속적으로 작품을 발표했던 그는 ‘자발적 실종’을 선택한다. ‘공산주의 나라에서는 경찰이 사생활을 파괴하지만 민주주의 나라에서는 기자들이 사생활을 위협한다’고 말한 그는 사생활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절감했을 인물이다. 우연의 도움으로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고, 지속적인 세미나를 개최하면서 그의 학문과 문학에 대한 이해는 깊어졌지만 냉전 이후의 지속적인 감시와 소설의 대대적인 흥행으로 인한 작가 개인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철학과 사색이 주 업인 작가에게 분명 어렵고 버거운 일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모국어로 쓴 글은 자신이 태어난 나라에서 읽을 수 없거나 혹은 읽히지 않는 것이 되어 버리고, 스스로 번역해서 쓴 글은 평단의 차가운 반응을 감내해야 하는 이주민에게는 더욱더.


“1세대 이주민은 뭔가 허공을 떠도는 사람, 정지상태의 존재 같아요.
자신의 진짜 집을 잃어버렸고, 다시는 어느 새로운 나라에서
제 집을 찾지 못할 사람 말이에요.”


베라 쿤데라가 아리아 슈맹에게 털어놓은 말이다. 프랑스 문화 권력에게 저항이라도 하듯 그는 스페인, 이탈리아에서 최초 발간을 시도한다. 파리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시위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만 100만 부 이상이 팔리고,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판매고를 달성하고, 영화로도 제작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하지만 이토록 유명한 작가는 37년 동안의 자발적 실종 중 비밀경찰에 협력했다는 구설로 언론 앞에 소환되기도 하고, 국적 회복 소식은 대중의 관심 밖에서 조촐히 이뤄진다.


“작은 언어를 쓰는 나라에서 큰 언어를 쓰는 큰 나라로 오려면
배짱이 두둑해야 합니다.”


아리아 슈맹이 인터뷰했던 쿤데라의 지인 중 하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의 말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한국에서 태어나 모국어로 쓰인 글보다 영어로 된 책과 자료를 더 많이 봐야 하는 사람에게 제2외국어는 도전이자 실험, 기회이자 한계이기도 하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한계가 보이는 싸움? 쿤데라조차 그 싸움에서 이기지 못했는데, 과연 그 도전을 회환 없이 마무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하지만 쿤데라는 그 중간 어드메 있었기에 그의 목소리를 구축하고 발전시킬 수 있기도 했다. 하루키가 영어로 글을 쓰고 그것 일본어로 옮기며 독특한 자신의 문체를 구축했듯이. 그의 글을 철학서나 혹은 악보에 가깝고, 어딘가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자유로운 사유는 독자에게 전혀 다른 심상과 캐릭터를 선사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의 독특한 유머감각과 농담은 희비극을 넘나드는 정치사와 개인사를 통과하게 만드는 무기였을 것이고, 그것은 독자가 마주하는 이 세계의 거대한 모순에 맞서는 작은 단검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에게 잊힌 이 노작가의 건강과 무운을 바라며 뜨겁게 그의 마지막을 지지하고 싶어 진다. 당신의 글이 내 인생 어딘가를 한껏 받치고 있노라고 전해주고 싶다. 당신이 묻힐 곳이 파리든, 프라하든, 언젠가 그 자리에 꽃 한 송이 바치고 싶노라고.


The novel is not the author’s confession: it is an investigation of human life in the trap the world has be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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