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PD가 읽은 영국이라는 물체

영국을 읽다 by 장정훈

by 해인

책을 읽다가 깜짝 놀라 몇 번을 뒤져 저자 이력을 찾았다.

짧게 신문기자 생활을 하고 영국에서 미디어 석사를 마치고 독립피디로 활동하고 있다는 게 다였다.

이 정도의 박식함과 성찰과 깊이와 품격을 갖추려면 도대체 무엇이 필요할까.

세속적인 관심은 어느 대학을 나왔고, 무엇을 전공했으며, 어떤 신문사에서 월급을 받았는지와 같은 곳으로 향하였으나 저자의 의도인지, 아니면 워낙 유명한 저자가 아니어서인지 저자 이력은 기본적 팩트가 전부였다. 도대체 이 사람, 뭘까? 하는 궁금증이 책을 읽는 내내 가시지 않았다.


적어도 이 책을 읽고 나면 여행이라는 것이 멋진 풍광을 보고 맛난 음식을 먹고, 인스타에 자랑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톡톡히 알 수 있으리라.


얼마 전부터 영국에 꽂혀서 영국에 관한 웬만한 책을 역사, 철학, 신화부터 여행기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하고 있다. 가장 실망스러웠던 것이 ‘영문학자가 돌아본 영국’이라는 주제였는데, 한평생 영문학을 공부한 사람이 ‘성지’에 가서 느끼는 것이 고작 그 정도의 깊이인가 생각이 들면, 대학시절 강단에서 철학 없이 배워들은 것을, 혹은 작은 식견으로 열망하는 것을 읊조리던 어느 분들이 겹쳐져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신문기자가 본 것은 그나마 조금 ‘가십’ 거리가 되곤 했는데, 딱 신문기사만큼의 깊이와 잠시 머문 사람이 잠시 머물 사람에게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하는 듯 가볍고 경쾌한 정도여서 마뜩지 않았다. 아 그리고, 그 예스런 문체라니…. 도무지 적응 불가. 자기가 너무 강한 작가들은 자기에게 취해 영국이라는 실체를 잘 벗겨내지 못하는 듯 보였고, 뭐 여행기야 여행목적이 다른 분들이 필요한 정보이니 번외.


영화를 보는 대신 읽는 사람이 많지 않듯, 여행을 떠돌아다니지 않고 사유 관찰 응시 성찰 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가장 짧은 시간 안에 가장 경제적인 비용으로 가장 유명한 곳을 섭렵하고 오는 여행도 여행이라 부를 수 있을까, 늘 궁금한데, 문제는 여행을 이 관점으로 자랑하고 강요하는 사람들이 많아 늘 여행 이야기가 나오면 침묵을 선택하게 된다. 무엇을 먹었는지, 어디서 잤는지, 얼마나 근사했는지…. 아 도대체 당신이 여행을 통해서 얻어 온 사유는 무엇인지는 단 한 줄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인가, 되묻고 싶지만 일 년 내내 일하다가 간신히 휴가를 내 다녀온 꿀 같은 여행에 ‘여행을 간다는 사실’처럼 더 벅차고 감동스러운 일이 뭐가 있겠는가, 하고 스스로 다독인다.


이 책의 저자 장정훈은 영국에서 25년을 살았다(살고 있다)고 한다. 신문기자와 다큐멘터리 PD의 접근법은 다를 터. 영화와 다큐멘터리의 접근법도 다를 터. 지긋한 호흡으로 오래 응시하고, 하나의 시선으로 손쉽게 정의 내리거나 단정하지 않은 것. 복잡한 사실들을 인내심 있게 채굴하고, 시공간을 아우르며 이어 붙이고, 자신의 관점으로 새롭게 해석하려는 시도까지. 시간과 공간을 함께 다르게 사유하는 노력은 여행이라는 기회를 통해 가장 값있게 빛을 발한다. 그는 수시로 한국의 매체에 타전하는데, 그중에서도 영국에 있는 탈북민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관한 다큐멘터리는 무려 7년을 촬영해 얼마 전 시사회를 가진 모양이다. 그가 가진 뚝심과 인내와 지긋한 호흡으로 미루어 충분히 그럼직한 주제이자 결과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때 빌 브라이슨의 여행기를 탐독했던 적이 있다. 여전히 유쾌한 전방위적 관심사는 인체와 우주로 확장될 만큼 그의 정력적인 글쓰기와 취재력을 인정하지 않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장정훈이 읽은 영국을 읽으면서 글은 결국 누군가의 인품을 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아무리 화려한 문체로 멋지게 달려 나간들, 아무리 방대한 역사적 사실로 누군가를 기죽이게 한들, 아무리 호들갑스럽게 침이 마르게 칭찬을 늘어놓은들, 우리가 누군가의 글을 통해 보는 어떤 세계는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의 호흡과 숨결의 절대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호흡과 숨결은 어떻게 억지로 만들어내거나 조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이 한 편의 글을 쓰기 위해서 얼마나 읽고 시간을 들여 사유했는지 우리는 너무나 절절히 알 수 있기에.


영국살이 25년이 훌쩍 넘었다. 그런데 이제야 겨우 책을, 그것도 첫 책을 쓴 이유는 자신감을 얻는 데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실이 사실인지, 기록이 신뢰할 만한 것인지, 통계가 유효기간을 지난 것은 아닌지, 나의 경험에 기억의 오류는 없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을 알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재차 삼차 확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난하기도 하고 무모하기도 한 '짓'이었다. 세상은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우리가 아는 과거도 새로운 기록의 발견과 시각으로 달라지는 일이 다반사다. 의미라는 것도 내가 생각한 의미와 독자들이 느끼는 의미가 다를 것이다. 강요할 수 없다. 독자의 몫으로 남겨둬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버렸다. 완벽에 대한 강박을. 그리고 한 줌의 자신감을 얻었다.

- 에필로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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