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간다는 것에 대해,『슬픈 짐승』
‘희망과 함께 들어와서, 고통과 함께 나가는 장소’는 어딜까요? 힌트 : ‘많은 이에게 현대 사회에 필수적인 장소로 여겨지는 곳’입니다. 정답은? 피부과입니다. 요즘 피부과는 밀려드는 손님으로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많은 이들이 내 피부에 맞는 ‘안티에이징’ 시술을 고민하고 예산을 체크하죠.
이들은 중세의 고행자와 흡사한 점이 있습니다. 온갖 도구로 (심지어 바늘이 많이 쓰입니다) 피부층을 조지는 고통을 기꺼이 감수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다만 정화하려는 대상이 다르죠. 중세 사람들이 무서운 흑사병을 정화하기 위해 고행을 선택했다면, 현대인들은 노화를 ‘병’처럼 바라본 나머지 고행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피부과 로비에는 예전 같으면 얼씬도 하지 않았을 중년 이후 남성들도 꽤 많이 보입니다. 20대 청년과 50대 중년이 옹기종기 앉아 있는 모습은 좀 생경하기까지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얼핏 듣기로는 여의도 증권가에는 환갑이 넘으신 강연자들이 피부과 시술을 받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나요. 그렇게 청년에서 노년까지, 젊음을 조금이라도 더 유지하고, 한 살이라도 더 젊어 보이고픈 욕망이 공동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걸로 끝이 아닙니다. 안티에이징으론 부족한지 요즈음은 ‘저속 노화’가 열풍이더군요. 독서 모임에서도 언급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속 노화’ 개념까지 오면 이제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따지지 않습니다. 뇌 기능과 인지능력, 감정 상태와 수면의 질, 체력 등을 고려해서 노화를 최대한 지연하고 건강한 삶을 살자는 개념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거기에 추가로 정신건강과 근로 시간, 공중보건과 의료 정책까지 고려한 복합적인 개념이죠.
저도 요즘은 ‘저속 노화’ 영상을 보며 몸에 좋은 렌틸콩을 따라 먹게 됩니다. 유산소 운동을 하며 조금이라도 더 젊은 뇌, 활기찬 몸을 만들고자 합니다. 물론 그러다가 일에 지쳐 만사가 귀찮아지면 가속 노화의 길을 선택하고 또 자괴감에 빠지곤 합니다. 오늘도 라면과 떡볶이로 식사를 때워버렸어… 하고요. 하지만 혈당 스파이크가 올 정도로 달달한 맛을 포기하기도 어렵죠. 아무튼 제가 자괴감에 빠지는 건 저속 노화가 옳다고 스스로 인지하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노화’를 예전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90년 대 방송에 나온 30대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는 사람이 많죠. 요즘 30대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이는 사람이 많거든요. 이렇듯 안티에이징과 저속 노화가 중요한 세태에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은 이해하기 어려운 책입니다. 내용이 어렵다는 말은 아닙니다. 얇고 담백한 문체로 쓰인 책이죠. 하지만 책에 담긴 세월의 무게감은 청춘의 이성으로는 아마 측량하기 어려울 겁니다. 어떤 내용이기에 그럴까요.
주인공은 아흔 살, 어쩌면 백 살쯤 된 노인입니다. 나이를 세는 것도 잊어버렸죠. 주인공의 집에는 거울이 없습니다. 화자의 독백처럼 ‘거울이 있다면 주름살을 세어보면서 나이를 가늠할 수 있겠지만’, ‘인생에 새로운 에피소드를 추가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순간 거울을 모두 깨버렸다고 하죠. 실제로 주인공을 아는 사람은 이제 세상에 없습니다. 사회에서 나를 증명해 줄 근거는 계좌에 찍혀 있는 통장잔고 뿐이죠.
거울을 보기 싫을 정도로 늙고 초라해진 나의 몸. 아는 이들은 대부분 세상을 뜨고 나를 잊어 완전히 사라진 인맥. 새로운 미래의 에피소드는 없고 과거를 회상하는 일만 가능한 상황. “우리도 언젠가는 이렇게 될 겁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참여자들은 세상의 종말을 외치는 광인을 보는 것처럼 표정이 딱딱해집니다. 내가 지금 쌓아 올리는 경력, 인맥, 지식, 건강 그 모든 게 시간의 흐름 앞에 사라지고 말 거라니. 새롭게 시작할 수 ‘없는’ 시절이 올 거라니. 한창 열심히 살아가는 세대 입장에서는 가당치도 않은 말이죠.
오래 같이 책을 읽은 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무 무서워서 이해하고 싶지 않았어요. 어쩌면 내 미래도 저럴 것 같아 공감하려다가도, 공감했다가는 지금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허무해질까 봐…” 감수성이 강한 청년들에게는 자칫 위험한 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볼 때 이 책에서 그리는 ‘노화’는 생물학적인 내용만을 고찰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아무튼 화자에게 깊이 공감할 수록 공포심이 드는 것도 이상하지 않죠.
그런데 노화는 정말 그렇게 공포스러운 것일까요? 언제부터 그랬던 걸까요? 최소한 고대 사회에서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가령, 오세이지osage 같은 아메리카 부족에서 자연에 대한 이해가 깊은 노인들은 ‘노호징가no-hozhinga’라 불리며 존경받았다고 하죠. 단순히 존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족 간 다툼의 중재에서부터 공동체 회의에서 입법까지 맡았다고 합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원로들의 주름살은 수많은 계절의 변화를 겪으면서 경험을 쌓아온, 우러러볼 만한 상징처럼 여겨진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죠.
반면 현대 사회는 다릅니다. 고 장춘익 교수는 <나의 작은 철학>에서 ‘노인 살해’라는 개념을 소개합니다. (저자 없는 북토크가 한 서점에서 열린 적이 있었는데, 장춘익 교수님의 제자들이 모여 스승을 조용히 추모하던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원래 노인은 사회적으로 존경받던 존재인데, 현대 사회에서는 ‘젊은 몸’의 이미지를 극단적일 만큼 반복적으로 강조하죠. 저자의 주장을 요약하면 ‘노인의 몸은 현대사회에서 이미 사회적으로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긴, 청년은 더욱 오래 청년으로 보이고 싶고, 중년은 청년처럼, 노년은 중년처럼 보인다는 말이 칭찬이 되는 세태에서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쩌죠. 의학이 발전하더라도 속도의 문제일 뿐, 우리는 천천히 늙어가지 않을까요. 과학계에서는 저속 노화를 넘은 역노화라는 개념까지 연구 중이라고 합니다만, 만약 늙지 않은 기술이 발명되면 우리는 노화를 더욱 공포스럽게 바라보지 않을까요. 인간의 자연스러운 조건이었던 노화를 그렇게 바라본다면, 우리 주변의 노인들은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까요.
‘노화’라는 개념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는 과정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가속 노화라도 하란 말이냐.’라는 말이 튀어나올 수도 있죠. 노화를 막기 위해 하는 내 모든 노력이 쓸모 없어지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요. 이렇듯 문학은 때로 우리를 공포스럽게 하고, 철학자의 통찰은 가끔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어쩌면 그게 인문학의 역할일지도 모르겠군요.
정리해 볼까요. 안티에이징과 저속 노화의 세태 앞에서, 슬픈 짐승과 노인 살해를 소환한다면 우리는 어떤 사유를 가질 수 있을까요. 단순히 요즘 세태를 비판하고자 하는 도구로만 인문학을 쓸 필요는 없겠지요. 이런 세태를 다시 바라본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가속 노화를 하는 극단적인 사고를 할 필요도 없을 거고요. 어쩌면 삶의 유한성을 바라볼 땐 사유보다는 소망이 어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저울의 양쪽을 바라보며 하나의 소망을 품습니다.
온 힘을 다해 건강한 삶을 추구하고, 어쩔 수 없이 늙어가는 내 모습도 사랑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게 인간의 유한성을 온전히 수용하는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동시에 내 주변의 나이 든 이들, 그리고 피안 너머를 떠난 소중한 이들을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길 바랍니다. 저는 종종 삶이 무한한듯 굴며 시간을 탕진하곤 합니다. 소중한 하루를 날렸다는 자괴감에 빠질 때면 시선을 돌려 밖을 바라보는 게 차라리 좋더군요. 그렇게 유한한 삶을 사랑하는 두 가지 방식을 바라봅니다. 오늘도 피부과에서 기꺼이 고행의 행렬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한 철학자를 애도하던 후인後人들의 풍경을 떠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