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 청년들의 행진

안개 너머, 점과 점을 잇기 위해.

by 부엽토
4. 이우환, 점으로부터, 1976.jpg <이우환, 점으로부터, 1976>


점 하나가 완전히 입장을 바꾸는 단어 한 쌍이 있습니다. 바로 ‘여행자’와 ‘여행지’이지요. 여행자는 방문하는 쪽이고 여행지는 맞이하는 쪽이죠. <무진기행>에서 주인공은 서울을 떠나 일탈의 장소인 ‘무진’으로 향합니다. 독자들은 자연스레 내 일상 바깥의 다른 공간을 상상하죠.



그러면 생각을 정반대로 돌려봅시다. 내 일상이 바로 ‘무진’에 있다면? ‘무진’이 내가 향해야 할 장소가 아니라, 내가 서있는 장소가 바로 ‘무진’이라면? 지방 청년들의 삶이 바로 그렇습니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놓고 본다면 지방은 늘상 안개에 가려 있는 무진과 비슷하지요.



‘사람은 서울로 말은 제주로’라는 격언이 조선조에 유행했다고 하죠. 해방 이후 산업화 시기에도 이 말은 얼추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요즘 세태를 반영하면 ‘취업은 서울로 휴가는 제주로’ 정도가 되겠군요. (책은 파주로 보내면 되나요?) 아무튼 지방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상경하는 일이 반세기나 지속되다보니, 수도권 과열과 함께 지방 소멸 우려도 심해지는 추세입니다.



저는 지방 광역시 거주자입니다. 그러니 상경한 친구들 입장에서는 ‘무진’에 남아있는 셈입니다. 물론 고향을 자주 왕래한다면 안개가 낄 새가 없습니다. 제 경험 상, 상경 3년차까지는 종종 고향을 찾습니다. 고향 친구를 붙들고 팍팍한 서울살이의 고충을 토로하곤 하죠. 이주민의 삶에 쉽게 적응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각자 다른 이주민들의 애환과 공감을 다룬 <빨래>같은 뮤지컬이 대박을 친 이유지요. 그러니 퇴직하면 다시 귀향한다는 말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인생의 마침표는 고향에서 찍겠다는 것이죠.



하지만 서울살이가 길어지면 마침표는 점점 흐러져 쉼표가 되곤 합니다. 당연합니다. 연차도 쌓이고, 경력도 쌓이고, 생활도 적응한데다가 결혼과 출산까지 수도권에서 이루었다면 앞으로의 삶도 거기서 그려나가야겠지요. 명절에 고향으로 내려오는 일이 드물어집니다. 고향 친구들과 상경한 친구들이 점점 말이 통하지 않게 됩니다. 연락도 뜸해집니다. 뜻밖의 균열이 생기기도 합니다. 서먹해진 친구가 생깁니다. 이제 상경한 친구들에게 고향은 잠시 들리는 여행지가 됩니다. 그때야 비로소 고향 지방은 안갯속 무진이 되는 셈이지요.



그렇다면 지방은 영원히 안개속 무진으로 남아야 하는 걸까요. 방금 상경한 제 친구들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태생부터 수도권에서 살아온 지인과 대화를 해보면 안개는 더 짙어집니다. ‘지방’을 말 그대로 지역 축제나 여행지로 인식하기 마련이지요. 제가 볼 때 자연스러운 일입니다만, 역으로 지역 축제, 여행지 외의 부분은 도저히 보기 어렵게 되죠. 물론 ‘수도권’과 ‘지방’을 굳이 대립 구도로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봅시다. 동양 신화 이야기입니다만, 이(螭)라는 작은 용은 안개 속에서 조용히 수양하다가, 돌연 성장해 하늘로 솟구친다고 하더군요. 그런 작은 용 같은 이들이 전국 각지의 무진에 있습니다. 다만 조용한 수양이라기보다 떠들썩한 축제에 가까운 일을 벌이고 있지요.



극히 일부만 소개하자면 이런 기획들입니다. 지방의 콜라텍에서 예술 전시를 기획하는 프로젝트, 정치색이 짙은 지역에서 고전을 읽으며 정치 공동체를 만드는 플랫폼, 제로웨이스트를 추구하는 비건 샵, 문학에 나온 요리를 재현하는 독서모임, 게이미피케이션을 적용한 각자 글쓰기 커뮤니티, 사색을 파는 복합 문화공간 등등. 저는 주로 문학이나 글쓰기가 소재가 되는 모임을 찾긴 합니다만, 상상력을 마구 발휘한 모임을 발견하면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집니다.



물론 지방에서 문화공간을 만드는 사업은 만만찮습니다. 낭만 하나만 가지고 되는 일은 아닙니다. 로컬숍 연구잡지 ‘브로드컬리’에서 출간한 ‘서울을 떠난 3년 이하 이주민의 가게들: 살고 싶은 곳에서 살고 있냐 묻는다면?’ 같은 책을 읽어보면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지속가능성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의 인터뷰가 실려있습니다. 똑똑한 사람들이 체계적인 분석을 가지고 도전하더라도 미래를 장담하지 못합니다. 먹고사는 문제, 주거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고뇌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새로운 도전이 이어집니다. 냉엄한 현실을 알고도 실험적 도전을 하는 이들은 연령 불문하고 청춘입니다. 이런 이들이 많아야 사회에 활기가 돕니다. 안개 속에 기꺼이 뛰어들어 축제를 벌이며 솟아오를 그 날을 꿈꾸는 이들이 바로 우리 문화의 잠재력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뛰어든 사람들에게 따스한 응원을 해줘도 나쁘지 않겠지요. 어떤 변화는 잘 보이지 않는 변방에서부터 이루어질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니 각자가 가진 지도에 점 하나를 찍기를 권유하는 바입니다. 요즘 지도앱이 참 잘 되어 있지요. 검색이 용이한 독립서점과 북카페부터 찾아보면 좋습니다. 내가 거주하는 지역도 좋고, 언제고 놀러가리라 마음 먹었던 지역도 좋습니다. 요즘은 SNS 홍보하는 곳이 많으니 참조하시고요. 다양한 경로로 찾아보면 각 지역에 뿌리박은 가게 몇 개 쯤은 발굴할 수 있을 겁니다.



찾았다면 십중팔구는 인스타그램 계정이 있는 가게일겁니다. (SNS는 정보 탐색 용도로만 사용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습니다) 여러분이 내향형이라면 가게를 직접 찾아가기 전에 팔로우를 추천합니다. 연관 계정으로 조금 수상쩍지만 재미난 활동을 하는 가게들이 같이 뜰테니까요. 연결고리를 타다보면 이런 활동을 하는 데가 있었나? 싶은 가게가 반드시 뜰겁니다.



여러분이 만약 외향형이라면? 직접 가게에 쳐들어가서 주인장과 말을 좀 섞다보면 내가 모르던 가게들을 마구 추천해줄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고보니 많은 내향형 독서인들이 책에 관해서만큼은 외향형이 되기도 하더군요. 내 성향마저 흔들어 바꿔버리는 취미가 있다는 건 축복입니다. 저도 조금 서먹해진 상경한 고향 친구와 함께 새로운 가게를 방문해 볼 참입니다. 가끔 점 하나가 완전히 새로운 풍경을 보여주기도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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