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질을 하는 여자’라는 의미의 욕 ‘화냥년’은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조선 후기, 병자호란으로 인해 청으로 끌려간 여성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됐을 때 ‘정절’을 잃었다는 이유로 욕을 먹은 데서 유래된 비속어다.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사회에 포용되지 못하고 오히려 배척받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이유에 대한 여러 가설 중 ‘환향녀’들이 힘이 부족해 전쟁에서 졌다는 ‘상징’ 그 자체였기 때문에 포용되지 못했다는 설이 있다. 전리품으로 끌려간 여성들이 돌아옴으로써 "힘이 약해 우리의 것을 뺏겼다"는 사실을 다시 사회 스스로에 상기시켰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심하게 말하면 야만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이런 현상은 비단 옛 일만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 역시 불행에 대해 배타적인 사람들의 모습은 여전히 남아있다. 지금까지 정립된 도덕과 윤리들을 살펴만 보더라도 약자나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 범죄에 피해를 당한 사람들은 감싸줘야 할 대상이다. 수많은 교육기관, 사회에서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연민과 안타까운 마음을 느껴야 한다고 배워왔고 이런 이들을 헌신적으로 돕는 사람들이 존경받는 모습 역시 봐왔다. 그러나 아직도 불행하고 불운한 이들은 종종 이방인이 돼버리곤 한다. 그들은 나와는 다르게 불행을 겪은 사람들, 안타깝기는 하지만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불행한 이들에 대해 잠시 동정을 하지만 동정과 연민의 감정이 모두 소비된 다음에 오히려 이들을 따돌리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2014년 모든 국민을 슬픔에 빠뜨렸던 세월호 사건의 피해자들 역시 이방인의 길을 걷고 있다. 서너 달 지속됐던 슬픔과 안타까움은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서서히 감정의 온도차가 달라지면서 세월호를 둘러싼 모든 것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세월호 특별법의 ‘특’ 자만 꺼내도 파르르 떠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사고당하면 모든 혜택을 다 받아야 하냐는 식의 볼멘소리도 드물지 않다. 어쩌면 이들은 세월호 사고에서 대한민국의 부조리와 무기력함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세월호 피해자에게 배타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우리가 생각해온 영향력 있고 선진국화 된 대한민국의 모습과는 달리 구석구석 썩어있는 폐단의 고리와 정부의 무능력함이 세월호 사건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세월호는 부끄럽고 차마 바라보기 민망한 대한민국의 민낯을 여과 없이 보여줬다.
그러나 고름은 더럽다고 피할 일이 아니라 반드시 치료해야만 하는 상처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환부가 끔찍하다고 덮어버리면 상황은 더 악화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능력이 없음을 한탄하며 남의 얘기처럼 바라보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 모든 진상에 대해 최대한으로 알아낼 수 있을 만큼 알아내야 하고, 절실하게 도움을 받고 싶은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지금껏 배우고 습득해왔던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최근 세월호 희생자인 임경빈군과 권오찬군의 유가족이 소년들의 죽음에 대해 다시금 의문을 제기하면서 우리 사회는 또 한 번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기회를 얻었다. 이것은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이며 보편의 문제다. 왜 세월호만이냐고 따져 물을 것이 아니라 세월호부터라도 바로잡자고 말하는 것이 옳다. 보기 싫다 해서 모르는 척 돌아서지 않고, 직면해야 하는 것이 옳다. 우리 사회는 충분히 아픔을 직면할 만큼 성숙한 사회다. 위정자들에게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말할 줄 아는 사회고, 발전된 민주주의와 시민의식을 지니고 있다고 뭇사람들에게 거론되는 나라다. 적어도 이 사회에서 불행 없이 살고 싶은 ‘환향녀’들을 ‘화냥년’이라 돌 던져 쫓아내는 일이 우리 사회에서 없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