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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Oct 27. 2022

키치와 캠프

#10



 고급 예술과 저급 예술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오랫동안 미술계에서 논쟁적인 위치를 차지해 온 질문이었다. 현대에 와서 예술을 고급과 저급으로 나누는 일이 큰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지만 취향과 형식에 등급을 나누는 일은 오랫동안 이어져내려 왔고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는 작품을 만든 사람의 실력과 완성도의 문제와는 별개의 문제다. 우리나라에서만 해도 옛날 사군자를 그리는 것은 고상한 선비들의 예술이고, 민화나 탱화 등은 저급한 예술로 취급받았단 것을 떠올려 본다면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친숙한 사회집단의 관습이나 습성, 취향을 '아비투스(Habitus)'로 설명했다. 아비투스는 집단의 의식 속에 구조적으로 만들어진 성향 체계를 의미하며 사군자는 고급, 민화는 저급이라 규정짓는 일종의 관습적 틀이다. 인간 사회에 계층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는 신화시대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계층별로 집단적 양식과 규범은 꾸준히 존재해왔다. 이 아비투스는 계층에 따라 각각 작용하고 있으며 섞이기 쉽지 않다. 따라서 부르디외는 이 아비투스가 계층 간 사회 이동을 어렵게 한다고 보았다.  


중세에는 계층을 나누는 기준이 신분이었으나 현대에는 주로 경제적 기준이 계층을 가른다. 그러나 이 정량적 기준을 충족하더라도 온전히 상류층에 진입하기란 쉽지 않다. 아비투스가 유리천장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자수성가했지만 졸부라고 손가락질을 당하는 이들은 대게 상류층의 아비투스를 습득하지 못한 경우가 많고, 이를 상류층의 아비투스로 바꾸지 못한다면 소외되거나 심지어 낙오되기도 한다. 한창 JTBC 드라마 스카이 캐슬이 유행하던 시절 전통적 부촌인(혹은 물려줄 것이 많은) 압구정 부자들은 스카이 캐슬의 부모들처럼 명문대에 목매면서 자녀를 공부시키지 않고 비교적 자수성가한 부자들이 많은 강남에서는 드라마 속 학부모처럼 자녀를 공부시킨다는 이야기가 돌았던 것을 보면 아비투스의 특성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현대미술에서 아비투스는 취향의 문제에 가깝다. 근대까지 예술은 주로 상류층이 향유하는 것이었다. 권력자들이 제작을 주문하거나 살롱에서 품평회를 열어 인정받았던 작품들만이 예술로서 인정받았지만, 그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 현대의 미술은 온갖 새로움과 반전으로 가득 차 있으며 추한 것, 더러운 것, 외설적인 것, 공포스러운 것 등 인간의 최극단까지 예술에 날개 아래 자리 잡았다. 그러나 여전히 고급 미술과 저급 미술의 분류는 암묵적으로 존재한다. (물론 이는 거친 분류다. 이미 현대에는 고급 미술, 저급 미술로 예술을 분류하는 경우는 잘 존재하지 않고 그 경계마저 흐릿해진 지 오래다. 오늘날 장르적 특성을 넘어 대중 예술이 과거 전통적인 고급 예술의 영역에 받아들여진 경우 역시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좀 더 쉬운 이해를 위한 분류임을 서술해둔다.) 예술계의 안에 받아들여져 미술관에 전시되는 작품들은 일종의 고급 미술로서 취급받으며, 좀 더 대중 친화적 혹은 비교적 적은 값을 치르고 소유할 수 있는 영역들 예컨대 만화·애니메이션, 대중 예술 등은 키치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월간 <민화>에 소개된 이발소 그림 , 근현대디자인박물관 박암종 관장 소장


 소위 '키치(Kictch)'로 통칭되는 저급한 예술에는 부정적 함의가 내포되어 있다. 키치란 저속하고 저급한 미적 속성이다. 예술적 감수성을 환기시키기 위해 상점에 걸린 모방된 그림들이나 프린트물, 명품을 복제한 짝퉁 같은 것들이 키치다. '키치'의 어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설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1870년 대 초 독일 뮌헨의 화가와 화상들이 비싼 그림 대신, 비교적 값이 싼 '스케치(Sketch)'를 찾던 것이 와전되어 키치로 불려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1910년대 이르러 국제적인 용어가 된 키치는 이전 세대와 구분 짓기 위한 용어로 사용되다 점진적으로 예술분야 전체에서 사용되었다. 예술품에서부터 취미 판단 등 어떤 것에든 사용되는 이 '키치'의 범주가 어디까지 적용되는가의 문제는 지금까지도 뜨거운 논쟁거리다.


 이미 인정받은 것을 모방하고, 베낀 것을 통해 대리만족을 얻으며 과시하는 특징은 키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의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아방가르드와 키치>에서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예술과 원색 화보가 있는 문학지, 잡지의 표지 삽화, 광고, 회화판 잡지나 선정적인 싸구려 잡지, 만화, 유행가, 탭댄스, 할리우드의 영화"를 키치의 예시로 들면서 "진정한 문화의 가치에는 무감각하면서도 특정 종류의 문화만이 제공할 수 있는 기분 전환을 갈망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생긴 대용 문화"라고 설명했다. 저속과 저급이라는 부정적 가치평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키치를 좋아한다. 키치는 비록 그것을 베끼고 흉내 낸 것일지라도 아름답고 예뻐 보이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문예 평론가이자 사회운동가인 수전 손택은 '캠프'라는 개념을 통해 키치의 미학적 가능성을 재고한다. 그가 1964년 발표한 수필 <캠프에 관한 단상>에서 '케케 묵거나 속된 것 , 기괴한 것'을 좋아하는 태도를 '캠프'라고 정의 내렸다. 캠프 이론은 기존의 순수 문학과 고급문화에 대한 일종의 반격이자 저항이었으며, 손택이 캠프의 감수성을 인정하고 정의 내린 것은 대량 소비사회에서 저급하다 취급받았던 비주류 문화들에 대한 여러 담론이 주류의 영역 안에서 논의될 수 있도록 발판의 역할을 한 것이기도 했다. 대중이 좋아하는 B급 감수성이나 촌스러움에 대한 노스탤지어는 캠프의 감수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현대미술에서 사실 진짜 '키치'를 찾을 수는 없다. 현대미술로서 인정받는 것 자체가 이미 고급 예술의 범주로서 인정받았다는 얘기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키치적 요소를 활용하여 캠프를 불러일으키는 작품들은 팝아트의 황제인 앤디 워홀 시절부터 유구하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작가가 네오 팝아트 작가 '제프 쿤스'다. 앤디 워홀이나 리히텐슈타인이 모더니즘에 반발하여 일상적 사물을 예술로 제시했다면 제프 쿤스는 키치적 대상을 소재로 이를 낯설게 만드는 방법을 사용한다. 풍선 강아지를 거대한 철제 조형물로 만든 <풍선 강아지>나 <토끼>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제프 쿤스 <풍선 강아지>, 2008
제프 쿤스 <토끼>, 1986

 

우리나라의 최정화 역시 키치적인 사물을 낯선 방법으로 배치하고 설치하는 방법으로 작업하는 작가다. 그를 대표하는 소재는 가장 한국적인 대량 생산물 중 하나인 플라스틱 소쿠리다. 색색깔의 원색 바구니를 탑처럼 반복하여 쌓고 나열하는 과정을 통해 진짜와 가짜, 작품과 상품,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흐릿하게 한다. 재래시장에서 볼법한 유리컵과 유리그릇들이 전시관에 나열되고, 싸구려 플라스틱이 주는 익숙함이 낯선 감각으로 바뀌는 과정을 직접 체험하다 보면 손택이 말한 캠프의 감수성을 잘 느낄 수 있다.


최정화 <코스모스> 2015(왼), <해피해피> 2010(오)


 키치 자체는 예술의 반대말과 같은 개념을 지칭하고 있으므로 그 자체가 예술로서 인정받을 수는 없겠지만 키치적 소재와 요소들이 현대 미술에서 커다란 인기를 끌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꺼진 비주류도 다시 보는 현대 미술 특성상 그 인기가 사그라드는 일도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아직은 키치로 취급받는 요소들이 언젠가 고급 예술의 영역에서 사람들에게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일을 예상해 보는 것도 현대미술을 지켜보는 이들에게 커다란 재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고급 예술의 아비투스를 깨고 도약하는 키치의 무궁무진한 예술적 활용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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