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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zzy Dec 02. 2021

108 계단

산책길


11월의 마지막 주말 저녁 책을 사러 해방촌에 갔다.

별책부록에 가서 퍼포머들에게 줄 시집을 사고 싶었다.

그날 공연 본 느낌을 그대로 연결할 만한

글들을 고르고 싶었다.

그런데 닫혀 있었다.

최근에 갈 때마다 닫힌 문만 보고 있다.

아마도 이사를 간 건 아닐까.

위치를 몇 달째 잘못

알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분명 열려 있을 시간 같은데,

아님 늦게 간 걸까.

왜 불이 꺼져 있을까, 하며

또 다음에 오면 되지, 뒤를 돌았다.


사실 인터넷 한 번 검색하면 되는데...

약간 그럴 때가 있다.

우연히 마주쳤으면 하는 장소.

굳이 찾지 않아도 길을 걷다가

발견하게 되고, 도처에 정보가 있지만

모른 채로 살다가

문득 나와 만나게 되는 시간.


만일 문이 열리지 않았다면

그러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다시 다음 방문에 근처를 배회하다

만나도 좋을 것 같은. 그런 바람.

나는 불이 꺼진 상점을 지나 다시 계단을 내려왔다.

우연히 길을 걷다

남산 주변 고양이 밥을 주시는 어느 시인도

마주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도 같았다.

함께 빵집과 만화책방에 간 적이 있는 길목이다.

(십대부터 오랜 시절 팬이었다가

삼십대에 인터뷰를 하게 됐고 해방촌 길목에서

시인은 내게 만화책을 사주셨고

나는 끝끝내 에이티엠에서 돈을 뽑아

만화책 값을 드렸고

다시 그 분은 파리바게트 빵을 사주셨는데,

그 빵집이 108 계단 밑에 있어

더더욱 사적으로 소중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렇게 몇 차례 오가다

정이 든 계단. 108 계단.

이 곳을 걸으면

프랑스 몽마르뜨 언덕 계단에 보았던

비슷한 정취가 느껴지고

심지어 다른 글자인데

다른 글자의 간판마저

 파리로 읽어버리는 고의를 저지르기도 한다.

P.A.R.I.S.


부산의 광복동 용두산 공원 가는 길목도 떠오른다.

남포동 시내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계단을 걷고

주욱 올라가는 길.

부산에 가면 꼭 찾아가는 곳이다.

시내를 지나 타워와 꽃시계가 있는

용두공원에 도착하면 부산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안개가 낀 날의

항구 바다 정경에 매료된 적이 있다.

대형 컨테이너와 먼 바다와 백화점 등이

오묘하게 이질적으로 섞이어 보였다.

뿌연 안개 속에서.


유희열의 「밤을 걷는 밤」에서는

필자가 이곳에서 홍콩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연상했다는

느낌이 나오는데 그것도 역시 동의한다.

짧은 계단과 승강기 안에서

멀리 여행을 떠난 '해방'감을 갖는 이 길이

홍콩에서 보았던,

그리고 왕가위 영화에서 결정적 배경으로 등장한,

왕정문이 양조위를 바라보던 계단을 떠올리게 한다.

도심 속 짧은 일탈, 해방감을 바랄 때 걷고픈 계단.

108.


계단 입구 노래방 이름이 특히 인상적이다.

자.기.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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