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으로부터(Draw from within)
램버트 컴퍼니 x 빔 반데키부스
코로나로 인해 개인 내면과 공동체는
얼마나 상처 받았고 또 어떻게 변해가는가.
연일 쏟아지는 코로나 관련 뉴스에도
슬픔과 보람을 분리해내고
코로나 이전보다 다시 활력을 얻을 수 있을까.
너무 거대하지만 또 밀접한
지금의 질문을,
영국 런던에서 춤을 추는 무용수들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었다.
그리고 묘하게도 공연을 보면서 기분이 나아졌다.
코로나블루와 팬데믹 속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충실히 지키면 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낯선 무용수들의 스텝을 타고 전달됐다.
<내면으로부터>는 영국 램버트컴퍼니의 신작으로
빔반데키부스 안무가 협업작인데,
극장과 동일 시간에 관객이 접속해
생방송으로 보는 공연이었다.
표를 예매한 관객은 문자 안내에 따라
코드번호를 입력하고 공연 시각에 감상하면 된다.
일단 녹화가 아니란 점에 보는 내내
어떤 장면이 이어질까 궁금했고
세련되게 장면 커팅이 넘어가고 끊김이 없어서
덜컥거리는 피로도 없이 볼 수 있었다.
시점을 카메라 시선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더 재미났다.
극장 곳곳을 카메라가 쫓고 있고
무용수 동작 가까이, 멀리 ,
양 사이드 , 카메라 앵글 바뀔 때마다 춤을
다채롭게 자연스러운 호흡으로 여럿을
동시에 볼 수 있었다.
얼마나 리허설을 많이 하고 정확히 동선을
짜놓았던 것인지, 인간적인 실수조차 안 보였다.
공연은 어느 면이든 스스로 무대를 선택해볼 수
있다는 게 더 매력이지만
코로나 시대에 이렇게라도
온에어로
무용 공연을 본다는 점 자체가 다행이었다.
게다가 작가가 미디어 아티스트이기도 해서
무용을 입체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단지 중계가 아니라 철저히 계획된 시점을
선사하는 듯 보였는데
그게 독단적이기보단 친절하게 느껴졌다.
바로 눈 앞에서 보듯 무용을 봐도
부담스럽지 않고 재미 있었다.
카운트다운으로 화면이 시작되면
어린 소녀가 왼손으로 에칭에 집중하고 있고
그렇게 새겨진 글씨가 공연 타이틀로 뜬다.
작품이 막을 열면
극장 옥상에서 두 남자가 도시 빛을 배경으로 춤추고
주변 런던 시내를 함께 비춘다.
카메라는 또다시 극장 안 통로 계단으로 향하는데
실제 성냥불처럼 빛을 이용해서
그 빛을 쫓게 한다.
빛의 시점으로 칼과 문자들을 보여주고
공포에 눌린 사람들을 지나면
그 빛이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가는데
무용수들이 그 빛을 손으로 넘겨받고 춤을 춘다.
빛이 사라지고 연기가 되면
그 연기를 자취로 움직임을 만든다.
불이 사위는 자리가 춤이 채우는 풍경이
어떤 위기와 대응이 되풀이되는 광경처럼 비쳐졌다.
정적인 흐름이 멈추면
귀기어린 음악 속에 좀비스러운 춤을 추기도 하고
장면이 전환되면 달콤한 남녀 듀엣으로 넘어간다.
그러다 사랑스러운 움직임을 하던 여성이
위협당하는 몸짓으로 넘어가고
메탈 속성의 끈 사이로 댄서들이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 움직인다.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왜인지 거듭 이어지는 장면들이 모두
내겐 코로나 시기를 넘어 자신의 자리를
지켜가는 무용수들 삶 그 자체들로 보였고
이들은 무슨 꾹꾹 눌러 벼르기라도 한 양
에너지를 폭발시키며 강렬히 움직였다.
그 생동감이 고스란히 그대로 전달됐다.
보는 내내 듣는 내내 설레고 또 극장의 어느 쪽으로
이동할지 어떤 음악으로 전환될지
눈에 띈 무용수가 다음 장면에선
어떻게 변해갈지 궁금해졌다.
특히 이들은 스튜디오 뒤편에 갱지처럼 갈색빛 종이에
각자 검은 붓칠을 해서 그림을 그렸는데
그 종이의 일부로 들어가서 그림이 되었다.
종이옷을 입은 생명체처럼.
그중 나무 그림이 시선을 가장 끌었고
다음 장면은 임신부 그림의 배가 되었던 무용수를
중심으로 생명 탄생 이미지가 이어졌다.
한 명이 다른 사람의 상체에 매달려
태어나는 아이를 표현하고
그 아이가 태어나면 파티가 벌어진다.
그러다 정작 그 아이가 무뢰한으로 돌변하고
주변을 공격하는 듯 이미지는 안정과 불안정을
넘나든다. 마이크를 잡은 무용수가
시끄러운 멘트로 소요를 만들어내고
집단의 장면이 끝나면 병원에서
코로나19로 격리된 듯한 여성이 등장한다.
마스크를 쓴 의료진이 그 주변을 모니터하고
녹색빛 배경의 벽이 사라지면 다시 응접실처럼
일상을 찾은 공간에서 춤을 추는데,
처음에 등장했던 소녀가 딸의 이미지로도 재등장한다.
기억나는 대로 적어서 중간의 여러 이미지들이
누락되었고 선후 관계가 뒤죽박죽되기도 했다.
그런데 내 머릿 속에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무용수 둘이 통신 전환수인듯 역할 연기를 하며
도시들을 연결하는데
내 귀로 '부산'이라는 지역명이 들렸다.
정확히 그 도시가 아닐 수도 있으나
그 순간 고유명사 부산이 너무 정겹게 다가왔다.
따로 떨어져 있으나 춤으로 연결돼
두루두루 극장을 둘러보는 시간을,
퍼포머들과
60여 분 간 함께 했고 그 연결된 느낌이
단어 하나로 집약된 느낌였다.
언택트 공연의 자구책은 결국 정면승부,
무대를 맨 눈으로 보게 하든
스크린으로 응시하게 하든
퍼포머들이 보여주는 춤은 동일하구나 싶었다.
그리고 한동안 불을 켜고 춤을 추던
무용수들의 역동적 에너지를 간직하고 싶었다.
움직임이 전달하는 불안감과 위로의 교차.
2020년 9월 24일 밤 8시~9시.
며칠 뒤
램버트에서 다시 중계 해준다는 메일을
받고선
알람을 해놓고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졸린 상태로 또 무용을 보다 잠이 들었다.
나중에는 아예 시간을 더 주고
녹화 영상을 서비스해줬는데
생방에 매료됐던 탓에
녹화는 TV 모니터를 연결하고 넓은 스크린으로 봐도
혼자 긴밀히 처음 접속한 8시, 새벽 4시
생방 기분은 나지 않았다.
공연팀과 내가 동일한 시간에 함께 있다는
기분이 더 좋았던가 보다.
누군가는 내게 프리미어리그 기다리는 축구팬 같다고
했는데 별반 다르진 않을 것 같다.
현대무용 티켓을 끊고 공연 오픈을 기다리면서
이전에 해보지 못한 단절적인 경험.
공연 온에어에 다소 회의적이었던 인상이
변하는 계기가 됐다.
홀로 늦은 저녁 런던 사우스뱅크의 램버트 스튜디오의
옥상 춤에 설레던 2020년 늦가을의 밤.
곧 이뤄질 퍼포먼스의 10,9,8...
카운트다운을 지켜보며
아주
오래 전 네스케이프에 처음 접속하던 순간,
무심코 루브르 박물관에 접속해
한 장의 전시 사진을 보기 위해
길고 지루히 견디던
90년대 세기말 봄의 한낮이 떠오르기조차 했다.
공연을 클릭하고 안무가가 극장 곳곳에 새겨놓은
지금의 정서.
어쩐지 낯설지만 또 경험하고 싶었다.
오히려 실제 빔 반데키부스의 울티마베즈
서울 내한 공연을 보았을 때
이질적이고 강한 느낌에
극장 3층 그 멀리에서도 멀미나는 듯한 기분으로
보았던 것보다, 떨어져 있지만 스크린으로
만나는 반데키부스가 더 따뜻했다.
어쩌면 그건 작업자의 변화보다는
받아들이는 시선의 변화일 수 있지만
한번의 직접 관극보다 온라인이 더 남은 예술가였다.
정시에 만나는 무용. 또 만나고 싶다.
엘지아트센터 안내톡
램버트의 재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