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Go Back

슬프도록 아름다운

by 레아

2020년 길을 걷다 무신사의 광고판을 볼 때면

2018년 여름 겨울 매료되었던 작품과

무용을 보며 떠오르던 영화 속 주인공,

그들 모습에

그 시기를 위로 받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무용과 영화 속 인물들의 고뇌와 밥벌이가

마치 모두 나의 것인 양 감정 이입되어

오랫동안 마음에 박혀 있다.

언젠가 재연되었으면 하는 공연과

스스로 생각에 잠길 때 다시 보고픈 영화다.

고백 & 버닝

-----------------------

버닝을 보고 극장을 나서던 날.

오후의 지는 햇살이 너무 무거워 걸을 수 없을 것 같단 생각을 했다.

몸으로 감지되는 열이 아니라 그저 공기 중에 부서지는 햇살이 세상의 어떤 사람들에게는 뒤통수를 치는 듯했다. 나는 내가 걸을 수 있는 가장 느린 발걸음으로

숨을 안 쉬듯 집으로 향했다.

무용 <고백>을 보는데 그 영화 속 유아인이 떠올랐다. 서울엔 젊은 개츠비가 너무 많아, 라며
작위적인 대사를, 그러나 폼나 보이고 싶은 말을 사랑하는 여자 옆에서 내뱉던 그 남자가 생각났다.

가난이 눈요기가 되어버린 자신과,

그리고 느닷없이 나타나 영혼을 홀린 투명한 해방촌 여자와

그 여자가 기대고 있는 방배동 남자를

이상스레 뒤쫓고 있던 파주의 청년.

그는 삶을 견뎌내고 있는 영특한 청년이었지만

늘 속에는 반항감과 두려움으로 자신을 감추고 있다.

쓰지 못한 글을 쓰기 위해 이유를 찾고 있는 사람처럼 헤매는 그가 문득 보고 싶었다.

택배 기사로 지원해 물류 공장을 찾았다가 고압적인 분위기에
뒤로 돌아 터벅터벅 걷던 그 아이, 그 소년을 <고백> 공연장으로 데려와 이 무용을 보여주고 싶어졌
다. 그렇다면 그는 위로받았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고백은 현대의 급박한 미션을 받아 수행하는 사람들처럼
젊은 세대의 노동하는 삶을 보였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든 홀로 해야만 하는 일이든

일을 대하는 태도들이 춤으로 드러났다.

시간은 쉴 새 없이 흘러가고

기계적 동력은 그 어딘가에서 멈추지 않았는데

이들은 괴짜섬처럼

다른 공간을 풀밭 위에 봉지 안에 그림자 안에 담아둔 채

그 안에서 일을 했다.

그러나 갇혀 있지 않고 다른 곳을 꿈꾼다.

첨벙거릴 수 있는 바닷가가 되기도 하고

어릴 적 앳된 기억 안으로 숨기도 한다.

그런데 더 두렵지만 당연한 건

숨어도 숨을 수 없는 어른이 된 현실이고,

그 현실들을 무용수들은 춤으로 표현했다.

박스로 나무로 봉지로 운동복으로

그들은 가둬놓을 수 없는 어떤 순간들을 묘사했고

그때쯤 눈물이 났는데 멈추지 않았다.

구겨트려놓았던 어느 기억을 건드는 것도 같고

만나지 못한 옛 친구가 떠오르기도 했다.

감정을 감춰두고

그게 발각되는 사람마다 처형당하던, 고다르의 초기작 영화가 겹치기도 했다. 최대한 쿨할 것!

동물적인 감각을 즉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이들이

그걸 감추고 로봇이 된 동물로 변해버린 순간들을

보여주는 듯도 했다.

로봇도 야생동물도 식물도 공통점이라면 유연함이겠지. 그런데 그 안에 기계적 시스템만 있느냐

유기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생명성이 있느냐

둘의 편차가 클 텐데

그 간극을 무용수들이 보여주었다.

슬퍼진 순간을 경험한 이후론

사소하고 간단한 소품들조차 슬퍼 보였다.

과거에 배우 J를 인터뷰 했을 때 그가 너무 슬픔에 이입되고 나면 물 잔만 보아도 눈물이 난다고 했는데

내가 그랬다.

무용수들이 조금만 움직여도

가만히 있어도 전진해도 후퇴해도 모두 슬펐다.

위로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머리는 다 있지만

가슴으로 뭔가를 느껴본 적 없이

내 안에 갇혀있던

때였다.

그런데 모므로 무용단의 협업이 비슷한 성향을 지닌 이들, 속에 뭔가를 불처럼 감추었으나 다 확 태워버리지 않고 아껴놓은 채 상대에게 건네주는 사람들을 데려왔고

그들의 움직임이 연달아 나타나니 그저 슬퍼졌다.
그럼에도 슬픔 속에 시니컬한 위트가 느껴져 좋았다.

한때 스머프가 반자본주의자라는 테마가 유행한 적이 있는데 이들은 협업하며 스머프처럼 열심히 일하지만

그 일률적인 노동의 세계를 호기롭게 혹은 패기 있게

깡있게 물리치며 사는 듯도 보였다.

사실 노동이 고귀하긴 힘들지만 숨 쉴 틈이 있다면

그 틈새에 의미를 부여하면 새로운 힘을 얻는 것 같다.

나는 그 틈의 빛을 고백에서 보았고,

버닝에서 세상을 무의식 안에서 태워버렸던

창작과 일 사이 갈팡질팡하던 그 소년에게 보여주고 싶어졌다.
공연을 보며 이 메모를 하는 버스 안에서 옛날 노래, 슬프도록 아름다운이 흘렀고

나는 갑자기 스무 살 때 함께 정처 없이 걸었던,

미래를 얘기하며

신설동부터 건대역까지

꿈을 나눴던 그 시절 친구가 떠올랐다.

동대문 노래방에 가면 저 노래를 부르곤 했지.

심지어 친구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졌다.

영혼이 있는 상태. 재령. 언젠가 소울을 갈망하는 주인공을 소재로 글을 쓴다면

그 시절 친구 이름을 빌려야지 생각했다.

그는 그렇게 바라던 꿈을 이루며 살고 있을까,

속으로 물었다.

무용 관람으로 영혼을 채운 밤.

오늘 본 공연 느낌의 제목은 슬프도록 아름다운으로 해야겠다. 눈에 박힌 이미지와 음악들을 기억하며.

-울컥했던 밤-.


이전 03화무용 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