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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낳고 처음, '나'로 외출한 날

by 고들정희

2008년, 추석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친정집이 있는 부산을 찾은 친구가 내게 특명을 하나 주었다.

“이번엔 혹들은 떼놓고, 우리 둘이 영화 보고 커피 마시기!”


싱글에겐 일상일지 몰라도, 아이가 생긴 이후로는 그런 소박한 일상마저 상상하기 힘든 커다란 미션이었다.

우린 비슷한 시기에 결혼해 동갑내기 첫아이를 낳았고, 생애 처음 겪는 육아는 고되고 외로웠다. 그런 시기에 서로의 존재는 큰 위안이었다.


친구는 결혼 후 서울에서 살았고, 친정이 부산이라 내려올 때면 딸을 데리고 우리 집에 놀러 오기도 했지만, 가끔은 친정에 아이를 맡기고 혼자 들르기도 했다.

반면 나는 1년 넘게 수유 중이었고, 아이는 내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수시로 젖을 찾는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는 것조차 부담이었다. 첫 아이다 보니 “이 아이는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뿌리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아이 없이 혼자서는 외출이란 시도 자체를 감히 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친정 부모님은 준혁이보다 한 살 많은 조카를 돌보고 있었고, 시어머님은 멀리 계셨다. 남편은 디자인 회사에 다니느라 밤늦게 퇴근하는 것이 일상이어서 주변에 전혀 육아의 도움을 받을 곳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만큼은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친구의 부탁을 따라보기로 했다.

미리 젖을 충분히 먹이고, 아이가 먹을 이유식도 다 준비해 두고 행여 뭐 하나 빠질세라 준비를 철저히 하고, 남편에게도 이것저것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나는 아이 없이 첫 외출을 시도했다.


아...그날 혼자서 외출할 때의 기분은 지금도 생생하다. 이렇게 홀가분한 마음이라니..

기저귀 대신 책 한 권을 넣은 가방을 들고 지하철을 탔던 나는, 잠시 싱글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홀가분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괜스레 설레고, 한편으론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를 낳고 거의 2년 만의 일이었다.


우리는 <맘마미아>를 골랐다.

아바 음악을 좋아하긴 했지만, 뮤지컬 영화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본 거였다.

아이 키우느라 영화는커녕 드라마 한 편도 못 보던 문화의 불모지 시절이었으니까.

영화 도입부.

소피가 갑자기 “Honey, Honey”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뮤지컬 영화였다는 사실도 그제야 깨달았고, 아바의 음악이 흐르자 내 안에 묻혀 있던 감정들이 솟아올랐다.

내가 사랑하던 장르, 내가 좋아하던 노래.

눈앞에서 펼쳐지는 무대 같은 화면에, 나는 숨이 막히도록 몰입했다.

특히 메릴 스트립이 딸을 떠나보내며 부르던 “Slipping Through My Fingers” 장면에선, 친구와 나는 감정이입이 되어 함께 눈물을 훔쳤다.

영화가 다 끝난 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아만다가 부른 “Thank You for the Music”이 흐를 땐, 내 감정도 절정에 달했던 것 같다. 이미 객석은 텅 비어 있었지만 우리 둘은 그 음악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했다. 한 편의 뮤지컬을 영화관에서 보는 기분이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그날 나는 영화 OST를 곧장 샀다. 그제서야 영화와 뮤지컬의 제작진이 같다는 사실을 알았고,
심지어 영화가 원작 뮤지컬보다 먼저 기획되었다는 이야기도 뒤늦게 접했다.

많은 이들이 뮤지컬의 인기에 기대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영화는 오히려 스크린의 장점을 살려 무대보다 더 웅장하고 아름다운 배경을 담아냈다. 그래서 나는 영화야말로 이 이야기를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방식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날의 외출은 내게 긴 여운을 남겼다.

영화 전에 들렀던 북적이는 커피숍에서의 커피 한 잔조차 꿈결 같았다.


돌아와 보니, 준혁이는 아빠와 단둘이서 생각보다 너무 잘 지냈다고 한다. 밥 먹고, 씻고, 제시간에 잠들었다고 했다. 한 번도 칭얼대지 않고 말이다.

그렇게 잘 지내는 아이를 두고, 왜 그리 망설였던 걸까.

앞으론 가끔 이렇게 남편에게 맡기고, 내 시간을 가져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행복한 하루였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아이가 마구 보고 싶어졌다. 나는 역시, 어쩔 수 없는 엄마였나보다.


며칠 전, 아이들이 짧은 방학이어서 함께 볼 영화를 고르다가 <맘마미아>를 다시 발견했다.

그 순간 나는 18년 전으로 돌아갔다.

그때 그렇게 껌딱지였던 준혁이는 이제 대학생이 되었고, 자기 사생활도 잘 공유하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좀 더 일찍 떼어놓을 걸 ㅎㅎ

조금 더 자주, ‘나’로서 외출했어도 괜찮았을 텐데.


갑작스러운 추억 소환으로 내 블로그에 들어가서 아이들의 어릴 때 옛 사진들을 찾아보니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초보 엄마였던 나는, 18년이 지나 어느새 다 자란 아이들을 조금 멀찍이서 지켜보는 사람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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