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eah J Oct 22. 2023

뭔가에 미쳐 있었던 그때 그  "기억 속으로"

오랜만에 가수 이은미의 "기억 속으로"를 유튜브에서 찾아 들었다.


"오후 햇살마저~ 지나간 거리에~
오랜 기억들은 내 곁을 찾아와~
뭐라고 말은 하지만 닮아갈 수 없는 지난날
함께 느꼈던 많은 슬픔도 후회하지 않았어~
내게 돌아와~ 담고 싶던 기억 속으로~
내게 남겨진 너의 사랑이 흩어져 가기 전에~"


이 노래를 듣는 게 도대체 몇 년만이지?

음악을 들으니 갑자기 실타래처럼 잊혔던 기억들이 와르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순간 아련하다가도 멍한 느낌마저 든다. 뭔가에 완전히 미쳐 있던 시기가 있었지.. 그때의 내가 그랬던 거 같다.


"정희야, 나 어제 콘서트에 다녀왔는데, 장난 아니야 너무 멋져!!!"


1994년 대학교 4학년 즈음이었던 것 같다. 서울 이모네에 놀러 가 있던 친구 윤미가 갑자기 전화가 와서 하이톤에 들뜬 목소리로 난리가 났다. 얼굴 표정은 어떨지 안 봐도 아는 사이다.

"이은미라는 가수인데 들어봤어? 홍대 소극장에서 콘서트하길래 사촌동생이랑 그냥 별 기대 없이 보러 갔는데, 진짜 노래 너무 잘해! 완전 멋있어~ 2주 뒤에 부산에서 콘서트 하나 봐! 같이 가자"


처음 들어본 가수인데? 누구지?


윤미와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만난 친구다. 멀대같이 큰 키에 이쁘장한 얼굴, 새하얀 피부에 부끄럼이 많은 그 아이는 나와는 참 달랐다. 큰 키 때문에 튀는 걸 싫어해서 언제나 등을 구부정하게 하고 다니고, 제일 뒷자리에 앉아 늘 흰색 카세트 마이마이에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세상 순수한 함박웃음을 지으면 하얗고 고른 이가 환히 드러나고 큰 눈에 기다란 속눈썹이 참 이뻤던 친구였다. 어느 날 노는 시간에 내가 먼저 다가가 "뭐 듣고 있는지 한번 들어봐도 돼?" 하면서 그 친구의 이어폰 하나를 빼서 음악을 같이 들었는데, 그 당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문세 4집이었다. 내가 너무 좋아하던 앨범이었고, 우리는 운명의 짝을 만 듯 그렇게 금세 친해졌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윤미와 나는 한국과 캐나다의 거리만큼 서로를 그리워하는 사이다.


학창 시절 우리  통하는 게 많았, 중학교 때는 오로지 공부만 하던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는 단짝 윤미와 함께 다니면서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란 콘서트는 다 보러 다니고, 연극영화 수 없이 많이 보러 다녔다. 윤미와 함께 다녔던 연극, 뮤지컬 팸플릿 파일이 아직도 친정집 다락방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학창 시절 좋아했던 가수들이 들국화, 김현식, 변진섭, 이문세 등이었는데, 부산에서 가끔이라도 연을 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용돈을 아껴가며 콘서트 티켓을 샀다.

그 당시 부산에서 조금 큰 규모의 콘트는 무조건 남천동 KBS 홀에서 했었는데, 그곳을 어찌나 자주 갔던지, 공연장 비상구의 지리를 훤히 다 알았다. 무대 뒤쪽으로 통하는 비상구 계단을 올라가서 문을 열면 스모그가 뿜어 나오는 무대 뒤가 나온다. 콘서트가 시작되기 전그 알싸한 스모그 향기는 늘 나를 두근거리게 한다. 밴드 세션들이 악기 튜닝을 하고 있는 무대를 지나 하나밖에 없는 가수의 대기실로 가서 문을 노크하고 당당하게 들어가 인사하며 가수들에게 좋아한다는 고백도 참으로 많이 했다. 내 현실 짝사랑 남자 친구들에게는 못했던 고백들을 ㅎㅎ 그렇게 만난 가수들이 변진섭, 이상은, 이상우 등 그 당시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가수들이었다. 음악을 좋아하던 여느 십 대들 못지않게 나는 그렇게 가수들을 향한 열병을 앓아가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런 내가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학생운동에 가담해 치열하게 4년을 보내며 운동권 노래들에 빠져 살다 보니, 대중가요를 거의 듣지 않고 살았다. 이은미 콘서트에 가자고 걸려온 친구의 전화가 그 후 나에게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거란 건 생각도 못한 채, 친구의 이끌림에 어떤 정보 하나 없이 콘서트장을 찾았다  그 당시 이은미는 "어떤 그리움" 타이틀 건 두 번째 앨범을 내고, 홍대 쪽에서 콘서트를 하는 중이었는데, 부산에서는 톨릭 소극장이라는 아주 조그마한 공연장에서 처음으로 단독 콘서트를 했다. 단독이라긴 하지만  소극장은 제일 앞자리에 앉으면 가수의 숨소리마저 다 들릴 정도의 작은 콘트장이다. 윤미는 이미 한차례 서울에서 공연을 보고 왔고, 나와 같이 두 번째로 콘서트를 관람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이은미는 중적으로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가수였고, 홍보조차 잘 되어 있지 않아서, 연을 보러 온 관객이 많지 다. 나와 윤미가 일 먼저 와서 콘트장 앞을 서성이고 있으니, 공연 매니저가 이은미가 리허설하고 있는 것을 미리 들어가서 볼 수 있게 해 주셨다. 아무도 없는 관객석 제일 앞자리에 앉아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리허설을 보던 그때의 그 충격이란..

아직도 그 순간이 잊히질 않는다. 화장도 다 마무리하지 않은 거의 민낯의 얼굴로 무대에 나온 그녀는, 날씬하고 큰 키에  커트를 입 짧은 커트머리를 하고 있었.  드럼 스틱 소리를 시작으로 라이브 밴드 음악이 연주되자 스탠딩 마이크 앞에서 목을 풀기 위해 불렀던 곡이 바로 캐니 로긴스의 footloose였다. 그 곡을 렇게나 맛깔나게 아니 자유롭고 신나게 부르는 가수를 본 적이 없다. 강하게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는 특유의 표정과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극대화되었고, 리듬에 맞춰 머리를 흔들 열정적으로 열창하는 모습과 손놀림 하나까지 다 멋있었다.  리허설 때의 그 한 곡으로 나는 이미 녹다운 돼버렸다.


여러 콘서트를 봤지만, 그 작은 무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수 이은미의 에너지는 도저히 헤어 나오기 힘들 정도였다.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2시간을 푹 빠져있다가 공연이 끝난 후 나와 윤미는, 관객들이 떠난 후까지도 이은미를 한 번만이라도 보고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170이 넘는 큰 키에 허리를 묶은 헐렁한 회색 롱코트에 찢어진 청바지, 갈색 헌팅캡을 쓰고 매니저와 함께 나왔는데, 그 자체로 너무 세련되고 멋있었다. 우리는 뻘쭘하 인사를 하며 콘서트가 너무 좋았다고 수줍게 말을 건넸다. 우리의 그 모습이 순수해 보였을까? 언니 우릴 보고 씩 한번 주고는 로비에 있는 어묵집로 걸어가며 "어묵 먹 가~" 하 원래 알던 사람처럼 친근하게 말을 걸어주었다. 와우.. 이은미와 같이 어묵을? 그렇게 두근거리는 만남을 시작으로 우리는 이은미의 부산 1 호팬이 되었다.


그 후로 은미언니의 스케줄을 어떻게든 알아내서 근처에 콘서트가 있으면 달려가는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자주 보는 콘서트인데도 볼 때마다 감동이었고, 언니의 노래 부르는 스타일, 호소력 있는 목소리 모든 게 좋았다. 발라드를 부르면 처음에는 미성 가녀린 목소리였다가 후렴구에 폭발적으로 어 나오는 바이브레이션, 밀고 당기는 끈적하고 허스키한 목소리트장에 앉아서 음악을 듣다 보면 가슴이 쿵쾅대고 그렇게 눈물이 나올 수 없었다. 은미언니는 당시 간간히 KBS "열린 음악회"에 출연해서 자신의 곡을 부르고, "노란 샤쓰의 사나이" 같은 대중적인 곡 몇 곡씩 불렀다. 무조건 라이브를 고집하던 언니가 설 수 있는 무대가 많 않았다. R&B와 블루스, 재즈누구보다 멋들어지게 부르고, 음악 사랑하는 그녀가, 대중들이 가사집만 펼치면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방 같은 프로그램에 나오는 게 안타까웠다.


1집의 "기억 속으로"와 함께 2집의 "어떤 그리움"이 매체를 통해서 조금씩 인기를 끌면서 이은미란 가수가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부산뿐 아니라 창원, 마산, 진주 등 주변 소도시에서도 콘서트가 있으면 어김없이 달려갔고, 이제는 매니저뿐 아니라 밴드 세션, 코러스 하시는 분들 까지도 우리를 다 알아봐서, 콘서트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일행들과 함께 숙소로 가서 술 한잔을 하는 사이가 되었다. 언니는 우리가 있어도 거리낌 없이 샤워를 한 후 샤워타월을 가슴선까지 두르고 나오는 섹시한 면이 있었고, 이쁜 척하지도 않았고, 남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그런 대담한 면과 언니가 고 있는 다른 세상들이 그 당시 내겐 동경의 대상이었고 이보다 멋진 여자는 없어 보였다. 언니는 무대 위의 모습도 당연히 멋있지만 무대뒤의 모습은 더 매력적이었다. 공연장 대기실에 앉아 있다 보면 후배 가수들이 인사를 하러 오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술자리에 유명한 남자 배우가 언니팬이라며 우리와 함께 동석하기도 했지만, 그런 연예인들을 봐도 설레기는커녕 내 눈엔 이은미가 최고로 멋졌다. 언니는 늘 우리를 사람들에게  "부산의 골수팬"으로 개시켜 주곤 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왠지 기분이 좋았다. 난 미지근한 건 싫으니까ㅎㅎ 그러고 보면 나는 이때 이미 추앙이란 걸 해봤구나.


은미언니가 단독 콘서트가 아닌 여러 가수가 함께 서는 행사장에 매니저 없이 친오빠만 대동하고 부산에 공연을 하러 왔을 때는, 삐삐도 없던 시절의 나에게 직접 집으로 전화를 걸어 주었다. "어느 어느 곰장어집으로 와라~" 이런 식으로.. 그날 우리 집에서는 '우와~ 이은미한테 전화가 왔어? 가문의 영광이네~" 하고 난리가 났다. 나는 나보다 부산의 맛집을 더 잘 아는 언니가 신기했다. 식도락에 술을 좋아하는 언니여서 부산에 오면 맛있는 식당은 꼭 들렀다 가곤 했다. 남포동에 있던 그 곰장어집은 주문받자마자 주인이 직접 곰장어를 잡아다가 껍질을 벗기고, 불판에 올려서 직화로 구워주는 집이었는데 살면서 먹어본 곰장어 중에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맛있었다. 야외불판에 둘러앉아 언니가 곧 앨범에 실릴 거라며 라이브로 불러줬던 크리스마스곡을 잊을 수가 없다. 언니는 술도 잘 마시고, 굉장한 재담꾼인 데다, 옆에 가만히 앉아서 이야기만 듣고 있어도 그 재미에 빨려 들어가는 마력이 있었고,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언니 머리가 커트머리에서 유명한 사자머리로 바뀌고, 맨발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며 맨발의 디바라는 호칭을 얻을 때 까지도 몇 년을 그렇게 이은미라는 가수에 빠져 살았다.


서울에서 콘서트가 열린 어느 날, 윤미와 나 그리고 정란 언니 셋이서 서울 가는 열차 티켓과 숙소를 잡았다. 우리는 그날 서울 콘서트장에서 언니의 서울 1호 팬들을 만날 수 있었다 ㅎㅎ

이미 언니에게 들은 적이 있어서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처음 얼마간은 먹해하며 경계하다가, 콘서트가 끝난 후 서울 1호 팬들과 다 함께 우리가 묵고 있던 숙소로 가서 군대에서 만난 전우애보다 끈끈한, 팬들 만이 느낄 수 있는 진한 형제애 같은 것을 나누었다. 다들 동생들이어서 편하게 같이 술을 마시며, 우리만 아는 은미언니의 비밀 이야기, 언니에게 섭섭함을 느꼈던 순간들과 에소드들을 공유하같이 이은미를 규탄하다가도 또 너무 좋아서 펑펑 울고, 우리 같은 의리 있는 팬들이 어디에 있냐흥분하기도 했다. 그때 왔었던 서울 1호 팬 중 한 명인 지영이와는 이제는 려야 뗄 수 없는 소중한 인연이 되어있다. 이은미라는 가수를 잊고 살고, 관심이 멀어졌을 때도 우리 둘은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서로의 미래를 걱정해 주고 신경 써주며, 늘 챙겨주는 평생 내편인 동생이다. 이제 우리의 대화 주제에 은미언니 이야기는 1도 들어가지 않지만, 함께 있을 때 어딘가에서 은미언니의 노래가 흘러나오기라도 하는 날엔 그때 그 시절로 1초 만에 돌아갈 수 있는 사이다. 우리 한때 이랬잖아, 그때 우리 너무 웃기지 않아? 완전 미쳤었지~ 하면서 한 가수에 빠져 허우적대던 그 순간들이 떠오르면 밤새워도 모자랄 이야기들을 하게 된다.  그때를 되돌아보면 20대의 나는  진심이었고, 여전히 그 시간에 후회는 없으며 그저 소중한 순간들로 남아있다. 미칠 수 있던 그때가 그립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은미언니와 함께 한 시간의 몇십 배는 더 오랜 세월을 함께 하며 또 다른 추억을 쌓으며 살아가고 있다.


은미언니가 이 글을 보게 된다면 나처럼 우리를 추억할까? 이제는 너무 큰 사람이 돼버린 진짜 대중들의 가수가 되어 있는 언니여서 문득 그때 그 시절이 꿈처럼 느껴지도 한다. 앞으로 그런 시간 다시는 오지 않겠지.. 그땐 말도 몇 마디 못 꺼내 20대 수줍은 아이가 이제는 같이 늙어가는 중년이 되어 더 끈끈하게 대화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1. 부산 공연장 앞에서의 골수팬들 왼쪽부터 나, 윤미, 정란언니, 지영이  2. 홍대 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은미 언니  3. 우리가 선물한 강아지 푸키를 안고 있는 언니
"언제부터인지~ 알 수는 없지만~
오랜 시간들이 낯설게 느껴져~
돌이킬 수는 없겠지 우리의 숨 가쁜 지난날
애써 지우려 했던 슬픔이 끝나기 전에는~
내게 돌아와 담고 싶은 기억 속으로
내게 남겨진 너의 사랑이 흩어져 가기 전에
내게 돌아와 닫고 싶은 기억 속으로
내게 남겨진 너의 사랑이 미소 질 수 있도록"
                                
  - 이은미 기억 속으로 -
작가의 이전글 혼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