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eah J Oct 15. 2023

혼술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 해보기

글쓰기 모임에서 매주 주제를 하나씩 내어 글을 쓰고 있다. 이번주 주제는 내가 낼 차례인데, 예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주제가 있어, 이 참에 회원들과 같이 해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예전에 김영하 작가의 에세이집을 읽다가 인상 깊은 내용을 본 적이 있다. 그가 대학교수로 재직하며 글쓰기 강의를 하던 시절, 학생들에게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 해보기"를 한 후 그 경험을 글로 써오라는 숙제 냈다는 것이다. 그중 한 여학생 다방이라는 곳을 혼자서 다녀와 썼다는 글이 아주 기억에 남고 독특했 내용이었다.


안 해본 일을 한다는 건 굉장히 두렵기도 하면서 낯선 것이다. 운전을 할 때도 가던 루트로만 가는 사람들은 한 번도 안 가본 낯선 도로 위에 서게 되면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일단 안 해본 걸 하고 나면 늘 하던 것만 하고 사는 우리에게 신선한 경험이 될 수 있고, 뭔가 큰 변화를 겪을 수 있기도 하다. 우리 마음속에서는 한결같음의 안정을 바라다가도 또 한 곳에선 새로운 변화를 바라기도 한다. 내가 이 주제를 고른 이유다.


글쓰기 주제를 쓰기까지 딱 2주일의 시간밖에 없었기에, 다른 곳에서 한번 살아본다거,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오지를 여행하는 큰 경험이나 변화를 해 볼 수는 없지만, 잠시나마 내가 한 번도 해 볼 생각조차 안 한 일들을 생각해 내려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있는 그 순간들이 재미있었다고나 할까?

머리를 금발로 염색해 볼까? 타투를 해볼까?

(이 글을 오픈하기 며칠 전, 안 해본 일 해보기의 일환으로 실제로 타투를 했다는 회원이 있다는 걸 알았다. 글쓰기에 진심인 ㅎㅎ)

탱고에 푹 빠져있던 지인이 떠올라서 하이힐 신고 춤춰야 하는 탱고 배우러 볼까.. 별별 생각을 다해 보다가, 이도 저도 아니면 "나의 해방일지"에서구 씨가 염미정에게 그랬듯 추앙이란 걸 해볼까ㅎㅎ 한 번도 안 해본 걸 하고 나면, 그 전하고는 다른 사람이 돼있더라면서..


나는 원래 혼자서 잘 지내는 편이다. 집에 있어도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많이 하는 편인데 그러다 보니 혼자 있어도 외롭거나 지루할 틈이 없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요리에 집중하거나, 악기 연습을 하거나, 일을 하거나, 이렇게 글을 쓸 때도 모두 혼자 있을 때 가능한 일들이다. 어차피 인간은 여럿이 있어도 대중 속에서 외로움을 느낀다. 오히려 혼자 있으면 내면이 강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게 나를 채우고 나면, 사람들을 만나도 지치지 않고 기서 에너지를 얻는다.

혼자서 뭐든 잘하는 나는 당연히 식당에서 혼자 밥 먹기는 너무 쉽고, 카페에서 혼자 커피 마시기는 일상이다. 혼자서 일본으로 2주일간 여행을 떠나 보기도 했고, 갑작스레 강원도 속초에 바다를 보러 가자는 친구와 만나기 위해 부산에서 강원도까지 10시간이 넘는 시외버스를 혼자 타고 간 적도 있다.


주제가 혼자서 하는 일에 국한된 건 아니었는데 혼자서 안 해본 것을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다른 건 모르겠는데 어도 혼자 술을 마셔본 적은 없 것 같다. 이란 건 원래 누군가와 함께 먹는 거지 혼자서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건 엄청 난 술에 대한 내공이 있어야 하는 아닌가? 어떤 이들은 괴로우면 혼자서 깡소주를 마시기도 한다는데 그렇게 소주를 안주도 없이 혼자 먹는다는 건 상상도 안된다. 이 참에 안 해본 일을 해봐야 하니, 남들에게는 너무 쉬울법한 혼술을 한번 해볼까?


원래부터 나는 술이 약하다. 내게 술이란 건 좋아하는 사람들과 있을 때 분위기에 취하기 위한 목적이기에 딱히 혼자서 술을 마실 이유도 없고 명분도 없다. 집에서든 밖에서는 해본 적이 없는 일이다.

술을 잘 못 먹는 편인 데다, 많이 먹으면 불타는 고구마처럼 얼굴과 몸 전체가 빨갛게 변하고 온몸에 힘도 빠진다. 술이란 걸 처음 접한 대학교 때는 악으로 깡으로 술을 마셨다. 그 당시는 무조건 소주 아니면 동동주였다. 한 잔이면 진한 다크 레드로 변하는 내 얼굴에 사람들이 오히려 걱정이 되는지 술을 많이 권하지는 않았지만, 술자리에는 늘 내가 빠지지 않고 있으니, 어떤 이들은 나를 술을 잘 먹는 사람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졸업 후에는 나를 특별히 생각해 주던 동생 한 명이 자신의 단골 술집에서 본인이 제일 좋아한다는 호세쿠엘보 테킬라를 꼭 먹이고 싶어 해서 잔주변에 소금이 묻어있는 신기한 작은 테킬라잔을 시키는 대로 원샷을 때리고 손등에 올려놓은 소금을 맛보게 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그곳에 엎드려 기절해 버렸다.  술을 만들어준 바텐더도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했다 하는데, 내 주량이 그 정도인지는 몰랐던 구가 자신만의 방법으로 호의를 베푼다는 것이 그만 그 사달이 났다. 그 뒤로 다시는 그런 술은 마시지 않는다.

근사하게 폼 잡고 싶을 땐 와인이 제격인데, 나는 와인을 먹어도 여전히 얼굴이 벌게진 채로 앉아 있게 되니 분위기를 잡기는커녕 그거만큼 보기 흉한 것도 없다.

그래도 맥주는 한두 잔은 먹어도 크게 취하지 않는 거 같고, 시원한 느낌이 들긴 해서 20대 때는 주로 맥주를 즐겼던 것 같다. 남편과 연애 때 술을 안 먹은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인지 바닷가에서 맥주 한 캔에 그만 취해 스르르 잠이 들어버려 나 스스로 내 술실력에 심히 실망했던 기억이 있긴 하지만.

어느 잡지에서 본 바로는 나 같은 사람은 알코올을 분해하는 효소가 없거나 부족하기 때문에 알코올의 독성물질을 배출하기 위해 몸속에서 혈액순환을 촉진시키느라 얼굴이 빨개지는 거라고 한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술을 멀리하는 게 좋다고. 내 몸 안의 효소 부족이라니 달리 열심히 노력한다고 잘 먹게 될 수도 없겠구나.


이렇듯 술과는 참으로 대척점에 있는 나인데, 사회에 나가선 내 이름이 주정희라는 이유로 "주"가 혹시  "술 주" 아니에요?라는 농담을 무진장 듣고 살았고, 이름만으로 아무렇게나 별명을 지어 부르던 초등학교 시절엔 남학생들이 나를 "주정뱅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가끔 내 이름의 이미지처럼 술을 잘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티브이에서 어떤 술이든 거침없이 들이키며, 아무리 도수가 높은 술이어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우아하면서도 맛있게 마시는 여주인공들을 보면 살짝 부럽기까지 하다. 상대방과 이야기로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게 더 많을 거 같은 생각도 들고, 왠지 술을 즐기며 잘 먹는 사람들을 보면 멋져 보인다. 그런 내가 캐나다에 와서 brewing company에서 만든 고퀄리티 진한 맥주들을 몇 번 맛보고 나서는 시원하게 담긴 차가운 이슬이 맺혀있는 맥주잔이 보이면 가끔 침이 꿀꺽 넘어갈 때도 있으니, 그나마 맥주가 나에게 맞는 술인 걸까?


혼술을 경험해 보기 위해 동네 술집을 검색했다. 운전을 해야 하니 시내 쪽으로 멀리는 못 가고, 다행히 내가 사는 마호가니에도 Brewing beer를 맛볼 수 있는 곳이 몇 군데 있었다. 그중 사진으로 보니, 아담하니 혼자 먹기에 쑥스럽지 않고, 크게 틀어놓는 스포츠 TV 중계 없을 법한 Craft Beer를 팔고 있는 The Mash라는 곳을 골랐다. 맥주 먹고 열이 오르면 바로 옆 아날로그 커피를 한잔 사서 산책하기도 좋은 위치다.

 마침 남편은 2주간 서스캐처원 주에 가있는 상태고, 가을이 깊어져 싸늘해진 데다 오전에 비까지 내려줘서 우중충한 날씨가 혼술에 완벽한 타이밍이다. 밤에 가야 혼술이 좀 더 혼술 다울 거 같아서 애들 저녁을 미리 차려주고, 저녁 운동을 끝낸 후 the Mash를 찾았다. 이런 맥주바를 혼자 가긴 난생처음인 데다, 이 가게는 아예 처음 가는 장소여서 들어가기 전 살짝 망설여졌다. 밖에서 보기엔 바텐더 한 명과 손님 한 명뿐이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들어가 보니 너무 작은  장소라 혼자 조용히 술을 마시기에 오히려 부담스러운 장소다. 바텐더를 슬쩍 지나쳐 멀찌감치 앉았는데도 눈에 띈다. 게다가 작은 맥주바인데도 여지없이 스포츠 중계를 크게 틀어놓다니. 혼자 조용히 음악 감상하며 먹기는 걸렀다. 바텐더가 다가와 몇 명이 올건지 물어보는데, 나 혼자라고 아무렇지 않은 척 이야기한다. 원래 혼자 와서 많이 시켜본 거 마냥 레드 에일 한잔을 무심하게 시키고, 이곳의 시그니처 피자인 딜피클 피자를 하나 시켰다. 여기서는 Half hitch 양조장에서 만든 술을 판다고 한다. 또한, 맥주를 만들고 남은 곡물로 피자반죽을 사용한다고 해서 처음 먹어보는 피클 피자의 크러스트 맛이 어떨지 매우 궁금했다.


커다란 잔에 가득 따라온 레드 에일은 수제 맥주라 그런지 역시 맛있었다. 입에 닿는 느낌이 엄청 진하고 짜릿하다. 게다가 피자맛은 혼자 있는 뻘쭘함을 잊게 만들 정도로 맛있다. 순식간에 두 조각을 먹어버렸다. 혼자서 맥주를 음미하며, 안 해본 일에 대한 감상평을 써 내려가본다.

혼술을 하는 이 시간이 많이 색다르면서, 생각보다 어색하진 않다. 가끔 혼자 와서 즐겨도 되겠다 할 만큼. 그런데 단점이 있다. 혼자 마실 때는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마실 때보다 훨씬 빨리 마시게 된다는 것이다. 내 몸속에선 빠르게 들어오는 독소를 배출하기 위한 혈액순환을 해주느라 아주 난리가 났나 보다. 안 봐도 비디오일 게 뻔하듯 얼굴이 불타오름을 느낀다. 바텐더는 혼자 앉은 나를 배려해서인지 계속 왔다 갔다 말을 걸어주며 신경을 써주고, 처음엔 거절했는데 두 번째는 기어이 다시 와서 겨우 다 먹어가고 있는 커다란 맥주잔을 원상태로 가득 리필해 준다. 젠장..

고맙다고 친절한 미소를 지어줬지만 사실 두 잔은 내게 조금 버겁다는 걸 바텐더가 알리가 없다. 원래 다른 사람들이랑 함께 마실 땐 맥주가 뜨끈 해질 정도로 천천히 마시는 편인데 혼자서 두 잔을 연속으로 빠르게 먹다 보니, 갑자기 취기가 핑하고 돌고 심장은 벌써 2배로 빨라지고 있다. 예의상 남기지는 못하고 두 잔을 싹 다 비우고 계산을 하러 일어서는데, 잠시 휘청하며 이미 갈짓자로 걷고 있는 나. 난 역시 혼술은 힘들구나 ㅎㅎ

아무리 맛있는 맥주피자도 혼자 먹으니 맛이 덜하다. 먹으면서 당장이라도 옆동네 사는 캘리를 부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에  차있다. 술은 혼자보다는 누군가와 함께 먹어야, 또 재미난 이야기가 섞여야 더 맛있어지는 게 진리인 거 같다. 앞으로 이곳을 다시 혼자 오게 될 거 같진 않지만, 혼술을 경험한 나는 오늘부터는 다른 사람이 된 것라고 애써 정의 내려본다.

이곳 맥주와 피자는 매우 추천할만하니, 음번엔 진한 이야기 함께 나누며 마실 수 있는 누군가를 데려와야 할 거 같다.

작가의 이전글 나를 설레게 하는 것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