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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ah J Oct 30. 2023

20년 후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  - 앙드레 말로

정희야!


내일이 드디어 캘거리 시니어 오케스트 뉴욕 공연 날이라며? 이번에 마침 북미 시니어들의 연합 오케스트라 축제가 뉴욕에서 열리고 캘거리 시니어 오케스트라 역시 초대받아 가게 된 점 정말 축하해! 그동안의 노력이 결실을 보는 날이라니 너무 설레겠다! 담은 내려놓고 잘 즐기다 와!

짐은 벌써 다 쌌겠지? 아마 신랑이 더 안달 났을꺼같은데? 연주는 하지도 않을 사람이 들뜨고 흥분해서 이것저것 챙겨주고 있을 남편 모습이 눈에 선하네. 남편은 70살이 되어서도 아내밖에 모르는 바보라니..ㅎㅎ 남편이 캐나다 와서 한국에서는 한 번도 안 해 봤던 목수일을 배워서 추우나 더우나 밖에서 일하느라 고생도 많았는데, 이제는 은퇴하고 평소 그렇게 바라던 하루종일 그림 그리고, 가구 만드는 일만 하는 삶을 누리며 여유롭게 여생을 보낼 수 있어 정말 축복이다. 10년 전 이사 오면서 남편 작업실 만들어준 거 참 잘한 일 같아.


네가  50이 넘어서 그 어렵다는 바이올린이란 악기와 처음 만났을 때는, 사실 이렇게 20년이나 연주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어. 적당히 즐기면 될 줄 알았던 악기가 매일의 연습과 피나는 노력 없이는 해내지 못하는 무거운 악기란 걸 알고 나서는 과연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느는 것이 보이지 않을 땐 좌절도 많이 했지. 특히, 두 번째로 만난 선생님께서 니 나이를 모르신 바이올린의 어려운 점들을 이야기하시면서, 40대까지는 그나마 배울만 한데, 50대로 넘어가면 아무리 연습해도 안 되는 부분이 있다고 말씀하셨잖아. 그때 "제가 바로  구제불능 50대예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려던 걸 꾹 참았지. 스스로 그 나이에 갇히게 될까 봐..

하지만 네가 한 해 두 해 넘어가서도 포기하지 않고, 매일 연습을 해내는 모습을 보고, 그래... 꿈을 좀 더 크게 꿔보는 것도 괜찮겠구나 생각했지. 몇 년 만에 그 어렵다는 바이올린 스즈키 교재 4권을 마스터한 후, 처음으로 캘거리 한인 오케스트라에 오디션이란 걸 봐서 합격을 했을 때는 너무 자랑스러워서 꼭 안아주고 싶었어. 같이 시작했던 다른 친구들도 다 같이 오케스트라에 들어갈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니?  

그동안, 여러 공연들을 거치고, 이제는 당당히 캘거리 시니어 오케스트라 바이올린 메인 연주자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고,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악기가 있다는 것만으로 참 행복한 일이라 생각해. 포기하지 않아 줘서 고맙다.


사실 나이가 걸림돌이 될 거였다면 모든 면에서 늦었던 네가 할 수 있는 게 어디 있겠니? 결혼부터 친구들 사이에서는 늦은 편에 속했고, 막내도 40살이 넘어 낳았지, 50대에도 여전히 초등학교 아들을 둔 엄마였으니 말 다했지 뭐. 캐나다에서 도전해  Bookkeeping 이란 분야 또한 새로운 영역이었잖아. 그러니 할 수 있는 거라곤, 나이라는 숫자는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그저 최선을 다하는 거 밖에는 없었지.

2023년에 프리랜서 일을 하기 위해 처음으로 Leah ProAdvisor라는 이름으로 북키핑 company를 오픈했을 땐 그저 한 회사의 일을 위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회사도 제법 커지고 경험도 많이 쌓여 지금 70의 나이에도 쉬지 않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구나. 할머니가 되어도 계속 일하고 싶어 했는데 그게 가능한 직업을 선택한 네가 자랑스럽다! 여전히 숫자와 씨름하다 보니 평생 치매는 없을 거 같은데? ㅎㅎ


50넘어 새로운 걸 배운 걸로 따지자면 스케이트 이야기를  할 수가 없네. 캐나다 와서 거의 10년간 밴치에 앉아 아이들과 남편이 스케이트 타는 걸 바라만 보다가, 오십한살에 지금 도전하지 않으면 더 이상은 힘들 거 같다 생각하고 큰 맘먹고 시작한 거잖아. 넌 나이 들어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가 되었을 때 남편이랑 손잡고 그리고, 손자 손녀들이랑 함께 스케이트 타는 게 꿈이라고 했었지. 얼마 전 첫 손녀와 스케이트 타게 된 그 순간은 정말 꿈을 꾸는 거 같았지.

넌 원래 미끄러지는 것에 대한 큰 두려움이 있잖아. (사실 미끄럼틀도 좀 무서워하지 ㅎㅎ) 그러다 보니 스케이트, 인라인 같은 운동은 엄두도 못 내고 있었어. 스키는 젊은 시절에 도전해서 조금씩 타긴 했지만 크게 다친 이후로 아예 다시 시작을 못했고 말이야.

너 그 날 기억해? 처음 스케이트 클래스에 가서 벽 잡고 걸어 다니는 모습을 친구 건희에게 동영상으로 보내줬더니, "울 친구 너무나 눈물겹다"라고 하면서 한바탕 같이 웃었잖아 ㅎㅎ 그런데 그날, 물을 무서워해서 평생 수영이라곤 안 해본 건희수영을 배우기로 결심하고 수영클래스 등록을 앞두고 있다고 너에게 고백했었잖아. 건희는 26살에 너랑 단들이 호주 여행을 갔을 때도 그렇게 멋진 수영장과 그림 같은 바다를 눈앞에 두고도 발에 물 한 방울 묻히지 못하고, 네가 수영하는 걸 바라만 봤던 친구지. 그래서 수영수업이 건희에게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지 넌 알잖아. 텔레파시라는 게 정말 있는 걸까? 너넨 떨어져 있어도 어쩜 그렇게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많은가끔은 신기해. 2023년 51살의 너희 둘은 서로에게 가장 두려 스포츠를 도전해 보며, 멀리서 서로를 응원하게 되었지. 그저 얼음 위에서 걸을 수 있는 것, 그리고 수영장에 몸을 담가 잠수할 수 있는 것일 뿐이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는 두려움에 도전하는 커다란 미션이니까. 그렇게  절대 포기하지 않았고, 이제는 건희와 함께 노년의 나이에 정은이가 살고 있는 하와이에 가서 바다 수영도 즐길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니 얼마나 좋으니? 건희가  몇 해 전 겨울에 캐나다에 왔을 때는 함께 레이크 루이스에서 멋지게 스케이트도 탔었고 말이야. 건희랑 정은이도 이번 미국 공연에 직접 응원차 올 거라면서? 다 함께 70살 생일파티도 겸해서 셋이서 뉴욕에서 만나기로 했다니 난 지금부터 설레어. 한국과 하와이, 또 캐나다에서 각각 떨어져 살지만, 노년이 될 때까지도 서로를 격려하고 아껴주는 이런 친구들을 둘 수 있다니 너는 참 행운아인 거 같아. 같이 아름답게 늙어가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


나는 네가 10년 전 조금 더 큰집을 사서 이사하면서 아예 거실 하나를 북클럽 친구들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었던 걸 잊을 수 없구나. 커다란 통 창에 아름다운 숲이 보이는 거실 식탁에 앉아서 언제든 에스프레소 커피 한잔과 책 이야기, 인생 이야기를 할 수 , 또 모임이 있는 날은 모두 함께 모여서  떠들썩하게 수다 떨며 음식도 나눠 먹으며 정을 쌓을 수 있게 동네 사랑방 같은 역할을 하게 된 것이 이사 와서 제일 잘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 집이 크니까 좋긴 하더라 ㅎㅎ

그 친구들이 눈이 어두워져도 안경을 쓰고 책을 읽고 세 된 목소리로 책 나눔을 하고 있다니 이 얼마나 대단한 여성들이니. 다들 오랫동안 뚝심이라는 운동팀에서 20년 넘게 꾸준히 운동을 하다 보니 정신도 맑고 몸도 건강한 할머니들이 되어서 이렇게 북클럽 활동도 계속할 수 있는 거 같아. 게다가 꾸준히 글쓰기 모임을 한 덕분에 드디어 니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에세이 한 권을 냈잖아.  아이들에게 또 손자 손녀들에게 엄마, 그리고 할머니의 삶이 어땠는지 글로 남길 수 있게 되어 맘이 편해.


정희야!  나는 네가 참 자랑스럽다.

아무런 연고지 하나 없는 캐나다에 그저 네가 가진 긍정에너지 하나만 믿고, 가족 모두 낯선 땅에 발을 디뎠으니.. 다행히 커다란 고비 없이 남편과 정착도 잘할 수 있었고, 아이들 역시 캐나다에서 좋은 반려자들을 만나 잘 살고 있고, 무엇보다 너는 캘거리에서 평생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났잖아. 그들과 함께 하하 호호 웃으며 외롭지 않게 여생을 보낼 수 있어맘이 포근해져. 이제는 그저 마지막 가는 길 조용히 집에서 눈감고 마감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다. 그렇게 보면, 너는 이 지구라는 행성에 태어나서 70년을 참 잘 살았구나. 마지막까지 이 여행이 즐거웠으면 좋겠다.


내일 바이올린 연주 무사히 잘 마치길 바랄게!! 나는 지금부터 부지런히 걸어서 그곳으로 가는 표식을 놓치지 않고, 무사히 그곳 잘 도착할 수 있도록 할게. 그때 그곳에서 우리 다시 만나..


2023년 51살의 내가, 2043년 71살의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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