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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ah J Nov 06. 2023

나의 여름.. 나의 20대

나이 듦에 대한 글을 쓰면서 나의 50대가 마치 초가을 같다는 이야기를 한 적 있다. 계절에 비유하자면 그렇다. 나의 여름은 언제였을까..

여름을 떠올리면 타는 듯한 강렬한 햇빛과 젊음, 싱그러움과 맑음, 그리고 무엇보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강인함이 곧바로 느껴진다. 지만 와 동시에 여름의 찌는 듯한 무더위와 습한 공기는 몸과 마음 지치게 하기도 한다. 나의 20대가 꼭 그랬던 것 같다.

내 20대 마치 손대면 데일 것처럼 너무 뜨거웠다. 마음속에 지닌 열정이 차고도 넘쳐  스스로도 감당하기 힘든 뒤늦은 사춘기를 겪는 것 같았다. 20대의 여름을 생각해 보면,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행진하던 대학생 시절.. 그리고 8월로마거리를 거운 백팩하나만 짊어지고 돌아다니던 꿈 많던 20대 중반의 내가 겹쳐서 떠오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했을 때 풋풋한 새내기의 설렘을 채 느끼기도 전에 큰 사건 하나가 일어났다. 나와 동갑이던 새내기 연대생 91학번 강경는 학생이 경찰의 곤봉에 맞아 죽었다는 뉴스드라인으로 대서특필 되었. 전국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섰다. 5월, 6월은 분노한 대학생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나 또한 당연히 그곳에 류되었다. 부패한 정권에 분개했고, 잘못된 역사적 사건들 속상해하며 이를 바로 잡고 정의롭게 살고자 하는 게 나의 커다란 가치라고 믿었다. 최루탄에 쓰러져가는 동기들, 경찰에 끌려가는 선배들을 봐야 하는 게 안타까웠다. 집회에서는 제일 선봉에 서서 노래를 해야 하는 노래패로 활동하며, 연주하고 노래를 렀다. 서울올라가 전국대학생연합(전대협) 집회도 여러 번 참가하며, 입구에서부터 들리는 신시사이저 소리가 내 가슴을 터지게 했던 시절.. 그때는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안위를 누리는 것이 시대에 타협하는 왜곡된 삶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고민이 많았다. 르익지도 않았던 20대 초반을 그렇게 신념과 정의라는 이름으로 전쟁처럼 길에서 보내다 보니 지칠 때도 있었고, 그때의 기억을 더듬으면 맑고 싱그러운 청춘이 아닌 고뇌에 휩싸인 마른 나뭇가지 같았고 어두운 터널과 같은 암흑처럼 느껴져서 안쓰럽다.

시대가 그랬다.


4년간 치열하게 살던 터널을 빠져나온 후, 나는 남들이 소위 말하는 번듯한 직장에는 당연히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미 내 동기들은 전공을 살려 대학병원, 종합병원의 행정 사무직에 거의 다 취직을 했지만 나는 그러질 못했다. 하물며 공부를 열심히 안 해도 교수와 친하기만 하면 추천서를 가지고 작은 병원에라도 들어갔다. 나는 평소에 관심도 없었던 병원에 취직하는 건 일찌감치 포기를 하고, 졸업 즈음에는 전공과는 상관없이 뒤늦게 영어공부에 푹 빠져 살았다. 그때부터 내 삶은 이전과는 조금 다른 궤도로 향하게 되었던 것 같다.

영어가 좋아지면서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보고 싶다는 열망과 막연한 동경심이 있었다.  마음이 넘치고 흘러넘쳐 나는 우리 집 다락방에서 밤이면 밤마다 눈 빠지게 지도를 들여다보고, 여행책을 섭렵하면서 어떻게 하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결국 친구와 둘이서 35일간의 유럽 배낭여행을 획하게 되었다.  당시 유럽은 배낭여행족들의 천국이었고 여자 둘 만 여행해도 될 만큼 안전했다.

처음으로 영국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고 비행기에 올랐던 그 순간이야 말로, 내 청춘의 진짜 여름이 시작된 거 같다. 7월 중순에서 8월 말까지 35일간 영국에서 프랑스까지 유럽 8개국을 무거운 백팩 하나만 매고 행군하듯이 그해 여름을 걸어 다니며 보냈으니, 여름 하면 그때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가장 열정적이었던 인간 주정희가 그곳에 있었다.

그 당시, 영어하나 못하고, 겁도 많던 친구 소영이가 나 하나만 믿고 함께 동행했기에 내가 그 친구를 책임지고 보호해야겠다는 생각도 커서, 친구몫까지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해내야 했다. 어리리 모든 것이 낯설었을 테지만, 친구는 내가 유럽에 이미 와 본 사람 같다며 감탄했다. 스마트폰, 내비게이션이 뭐예요 시절에 커다란 종이 지도 하나만 펼쳐 들고 골목골목 숙소를 찾아다니다 발이 꺾이기도 여러 번.. 내 뒤를 졸졸 따라오는 친구 때문에 겁이 난 척 도, 길을 헤매는 척 도 하지 못했고 오로지 직진.. 직진 정희가 이때 탄생했나 보다.

숙소에 도착하면 발에 물집이 잡히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고, 그날 빨래를 마무리하고, 간단한 저녁을 만들어 먹고, 자기 전 다음날 일정을 살피며 미리 길을 확인하고, 또 다른 도시의 숙소를 찾아가고, 기차시간을 확인하는 날이 반복되었다. 한 달 만에 진정한 배낭여행족으로 거듭나 있었다. 나중엔 유럽의 모든 건물이 비슷비슷하게 보일 정도로 큰 감흥이 없고, 매일 아침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는 게 지치고 고 순간이 찾아오기도 했다.

그러던 중 여행 막바지 로마에 도착했을 때를 잊을 수 없다. 가장 무더웠던 날이었고, 뜨거운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서 비추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너무 좋아하는 오드리 헵번의 영화 "로마의 휴일"을 생각하면서 그 영화에 나왔던 명소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니 언제 힘들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 속 유적지들을 밟으며, 내가 이곳에 있는 모습이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탈리아는 내게 힘을 주는 곳이었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 도착했을 때는 그동안의 피곤이 모두 다 날아갈 정도로 물만 바라보고 있어도 행복하고 좋았다. 수많은 실수를 겪은 후 나는 이제 길 찾는 데는 도사가 돼버려 로마와 베네치아의 미로 같은 동네 골목들을 둘이서 신나게 돌아다녔다. 수상버스 바포라토를 타고 다니며 시원한 바람을 맞을 때는 그 이상의 천국이 없는 것 같았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내 20대의 진정한 젊음은 모두 길 위에서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 때 땡볕에서 가두시위를 벌이고, 밤새 찬 이슬을 맞으며 대자보를 붙이고, 야외무대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공연을 했고, 유럽의 낯선 거리를 한없이  다녔던, 그때 그 순간을 꽉 채워 주었던 시간 하나하나가 길 위에서였다.

유럽 배낭여행 때 가져갔던 카메라가 너무 후져서 10년후엔 형체만 남게 될 것 같은 흐릿한 사진들..

유럽 배낭여행 사진들을 꺼내보면 너무 흐릿해서 여기가 정말 유럽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내 기억에는 너무나도 또렷한 그해 여름..

그때 나에겐 용기가 있었고, 희망이 있었고, 꿈이 있었다. 민들레가 가을에 만개하기 위해 여름에 충분한 햇빛을 받아 들이 듯 나 역시, 길 위로 나가 아낌없이 모든 것을 온몸으로 흡수하고, 시도고, 나아갔다.


유럽의 한 달간의 배낭여행내 삶의 터닝포인트가 되었을 정도로 임팩트가 컸다. 캐나다에 와서 살게 된 것도 그때가 시작점이지 않을까?


여름은 젊음이다. 이 한 단어 외에 달리 어떤 게 필요할까?

나는 그때 그 여름이 그립다. 돌아갈 수 없어도 그 추억을 먹으며 다시 또 10년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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