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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가을이었다

by 고들정희

내 생일은 10월 22일이다. 나는 가을의 정기를 듬뿍 받고 태어났다. 가을 "추" 자를 써서 친구들끼리는 농담처럼 "추녀"라고 부르곤 했다. 캐나다에 온 이후로는 그 말이 좀 무색해졌다. 이곳의 10월은 이미 겨울의 문턱이기 때문이다. 가을여자라고 하기엔 시기가 애매하고, 그렇다고 겨울여자라고 하기도 뭣하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10월 내내 선선한 공기와 함께 단풍이 오래 머물렀고 나무들도 아직 이별할 준비가 덜 된 듯했다. 세계의 날씨가 변하고 있는 건 분명하지만, 그 덕분에 올해는 내 생일에도 드물게 가을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한국에 살 때는 생일마다 뭘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엄마가 미역국을 끓여주셨을 테고, 친구들과 조촐한 파티를 했겠지만, 특별히 떠오르는 장면이 없는 걸 보면 늘 비슷한 생일을 보냈던 것 같다.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에도 그랬다. 감동의 선물도, 눈물의 이벤트도 없었다. 이래서 일기를 써야 하나 싶다. 정말 없었던 건지, 아니면 기억이 다 증발한 건지, 나도 모르겠다...ㅎㅎ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인생에서 가장 화려했을 수아 씨의 50번째 서프라이즈 생일파티만큼 대단한 생일을 맞아본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드레스와 한복, 축하공연에 케이터링까지 완벽했다. 이런 생일을 한 번쯤 누릴 수 있다는 건, 인생의 큰 복이 아닐까?

나는 내 50번째 생일을 그냥 흘려보냈기에, 자축하는 의미로 혼자 여행이라도 갔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인지 수아씨의 멋진 50살 생일이 조금 부러웠다.


며칠 전 아침, 인스타그램을 켰다가, 오래전 한국에서 함께 일하던 친한 동생이 결혼 20주년 기념이자 생일선물로 남편이 초록색 미니쿠퍼를 선물해 줬다며 커다란 리본이 달린 차 앞에서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을 올렸다. 그 멋들어진 차는 개그우먼 박나래가 타고 다니는 차와 같아 보이던데, 아내를 위해 차를 선물해줄 수 있는 재력이라니 대단해보인다. 나랑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 그 동생부부는 결혼 10주년에는 남편덕에 이태리 여행을 다녀왔다는데 샐러리맨이라도 다 같은게 아닌가보다. 나라도 자랑했을 것 같다.

나도 10월엔 생일뿐만 아니라 결혼 기념일도 있지만 특별한 이벤트가 없었다 .


그날 아침, 나는 데이지를 산책시키며 목줄 훈련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 애는 미니쿠퍼를 모는데, 나는 이 추운 아침에 개를 몰고 다니네' 하며 피식 웃음이 났다. 괜히 인스타 사진 하나로 비교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이 우스워졌다.


그럴 때마다 내가 쓰는 방법.

'에이, 미니쿠퍼는 기름값 너무 나오잖아. 차라리 데이지가 연비가 훨씬 낫지'

이렇게 자조섞인 웃음으로 승화시킨다. ㅎㅎ


나는 늘 '비교하지 않는 삶'을 신조처럼 달고 산다. 타인의 기쁨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내 일상에서 작고 단단한 행복을 찾자고. 그런데 사람 마음이란 게 참 묘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질투와 부러움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그리고 이내 그 감정이 부끄러워진다.


올해 생일 저녁, 남편은 늘 그렇듯 꽃다발을 들고 들어왔다. 나는 생일상 대신 돼지고기 수육을 해놓았다. 내가 차리는저녁상에 미역국은 왠지 하기 싫었다. 남편은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텀블러를 선물했다. 이미 쥬얼리를 미리 받았던 터라, 또 웬 선물이야 했지만, 생일에 받는 선물은 또 기분이 남다르다. 막내는 멋진 그림을 그린 손카드를 선물해 주고, 돈 버는 첫째랑 둘째는 "엄마 겨울 부츠 하나 고르세요"라며 자기들이 계산하겠다며 각자의 방식으로 마음을 표현해 준다.


기쁨은 크기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라는 걸, 나이를 먹을수록 더 알게 된다.


나는 미니쿠퍼대신 데이지를 몰고, 명품대신 아들들이 선물한 따뜻한 부츠를 신는다. 남편이 선물한 텀블러에 커피를 담아 계절을 느끼며 산책을 한다.

바람은 선선하고, 발아래 밟히는 단풍도 여전히 곱게 물들어 있다.


올해도, 꽤 괜찮은 가을이었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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