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 워크숍] 4. 흙수저의 삶

by 고들정희


자서전 워크숍을 진행하다 보면 참가자들의 어린 시절, 학창 시절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지난 시간, 참가자 한분이 과거 한국의 촌지 문화에 대해 말씀하셨다. 어릴 때부터 유복한 환경에서 곱게 자라셨는데 결혼 후 아이를 학교에 보내며 학교 측의 끊임없는 촌지 요구에 지쳤고, 더 자유로운 교육 환경을 아이들에게 누리게 해주고 싶어 캐나다 이민을 결심하셨다고 한다. 강사로 함께 참가한 지혜가 옆에서 '저도 엄마가 학교에 다녀가시는 날이면 이상하게 선생님들이 나한테 잘해주시더라"며 농담 섞인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엄마가 선생님께 책을 선물하면 책이 자꾸 다시 돌아오고, 결국 그 책 속에 봉투를 넣어 드려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사실 나도 그 시절의 학교를 다녔지만 촌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학교에서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었던 건 어쩌면 그것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5학년 때 학급 임원을 맡아, 학교 행사에 엄마가 처음으로 오셨던 날이다. 교실 뒷편에 서서 내가 손을 들고 발표하는 모습을 보며 엄마는 몹시 기뻐하셨다. 그날도 엄마는 촌지 같은 건 준비하지 않으셨을 게 분명하다.


나보다 네 살 많은 오빠는 같은 초등학교에서 6년 내내 반장을 했다. 엄마가 학교를 한 번 도 가지 않으셨는데도 말이다. 엄마는 늘 그 사실을 훈장처럼 자랑하셨다. 우리 집은 어떤 대단한 신념이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그럴 형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 시절에 오빠가 어떻게 6년동안 반장을 계속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때는 돈 있는 집 아이들이 대부분 반장을 하던 시절이었다.


오빠가 6학년때, 담임 선생님은 보이스카웃 가입을 권유하셨다. 비싼 회비가 부담스러웠을 텐데도 엄마는 오빠에게만은 보이스카웃 가입을 시켜주셨다. 오빠의 보이스카웃 가입은 마치 내가 걸스카웃이 된 것 같은 대리만족과 우쭐함을 선물해 주었다. 그 시절 보이스카웃, 걸스카웃은 아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남자들은 파란색 반바지 단복에 노란색 스카프를 매고, 무릎까지 오는 양말을 신었으며, 여자들은 베이지색 조끼 원피스안에 흰색 카라 티셔츠를 입고 베레모를 썼다. 방과 후 빳빳하게 다려진 단복을 입고 운동장에 줄서서 모여 있는 모습은 어린 내겐 마치 범접할 수 없는 다른 세상처럼 보였다. 오직 잘 사는 아이들에게만 주어진 계급장 같았다. 선택받은 소수에게만 혜택을 받게 했던 그 시절의 한국 교육 문화는 돌이켜보면 참으로 잔인한 풍경같다. 배움과 경험의 기회가 아이들의 설렘이 아닌, 부모의 지갑에 의해 결정되던 시절. 학교는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의 장이 되어야 했음에도, 오히려 잘 사는 자와 못 사는 자를 선명하게 구분짓게 만들었고, 아이들의 순수함을 담보로 우월감과 결핍을 동시에 심어 주었던 잘못된 문화였던 셈이다.


어린 내가 느낀 가난은 그런 것이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마음 밑바닥에서 불쑥 솟아오르는 열등감 같은 감정. 요즘 말로, 부모에게 물려받을 유산이 있으면 금수저, 없으면 은수저, 오히려 부모님께 돈을 드리고 부양해야 한다면 흙수저 라고 한다. 그런데 여유가 없어서 해드리고 싶어도 못한다면, 그것도 흙수저 아닌가? 나는 어쩔수 없는 흙수저였다.


서른 세 살에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결혼할 때 양가 도움 전혀 없이 우리 힘으로 결혼식을 준비했다. 그러다 보니 예물로 다이아몬드 반지는 우리에게 사치였고, 내가 골랐던 반짝이는 큐빅이 박힌 화이트 골드 반지는 어떤 보석보다 예뻤다. 신혼집 전세를 마련하는 것도 둘이 모은 돈으로 마련했다. 나는 첫아이를 낳고 회사를 그만두게 되어 외벌이였기에 주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검소하게 살림을 꾸리는 것 뿐이었다. 되도록이면 외식은 하지 않고 집에서 요리를 해먹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요리에 문외한이었던 내가 아이를 낳은 후부터는 이유식도 직접 만들어 먹이고, 아이들 간식을 위해 베이킹도 시작하게 되었다. 집은 늘 깔끔하게 유지하며 살림하는 주부로서의 자부심을 느꼈다. 가족의 건강은 내 손으로 지킨다는 신념도 있었다. 요리가 재미있었고 살림이 좋았다. 우리는 다행히 싱글때 각자 모아둔 적금이 있었기에 결혼 일 년 만에 해운대에 아파트를 사서 내집 마련을 할 수 있었다. 처음 내 손으로 집을 사고 부동산에서 인감 도장을 찍던 날,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거나 잘못될까 봐 밤잠을 설쳤던 기억이 선하다. 그 아파트가 종잣돈이 되어 캐나다 이민을 올 수 있게 될 줄은 그때는 미처 몰랐다.


삶은 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결혼생활 중 두 번이나 남편의 실직을 겪었고, 세아이를 키우며 어떻게든 잘 버텨내며 살아야 했다. 나는 절박한 마음으로 아이들이 낮잠자는 시간을 틈타서 자기 계발서를 읽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때 읽었던 보석같은 책들은 내게 큰 위안이 되었고, 내가 무너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준 힘이 되었다. 책 속에서 발견한 희망과 삶의 가치들이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들어 준 것 같다.


남들보다 가진 건 많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당시 내가 잘 살고 있구나 하고 느낀 건 아이들이 건강했고, 집에는 늘 맛있는 집밥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늘 작은 것에 만족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고, 아이들도 구김살없이 자랐다. 그리고 필요할 때면 언제나 엄마가 옆에 있어 준다는 사실은 아이들에게 큰 평온함을 주었다. 나는 그 시절, 하루하루 작은 행복에 집중했다. 그래서인지 마음만은 어느 누구보다 풍족한 시기였다.


초등학교 시절 운동장에서 보았던 보이지 않는 선은 어린 내게 깊게 각인 되었을 것이다. 세 아이의 엄마가 된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이민이라는 낯선 길을 선택한 이유도, 어쩌면 그 기억의 연장선에 있을지 모르겠다. 내 아이들만큼은 모두가 동등한 기회를 누리고 각자의 빛깔대로 자랄 수 있는 곳에서 살게 하고 싶다는 소망. 운동장에 서서 그저 바라만 봐야 했던 그 무력감을 내 아이들에게는 결코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이민은 단순히 사는 곳을 옮기는 결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이들을 위해 엄마로서 해줄 수 있었던 가장 적극적이고, 간절한 선택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느낀다.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 중 나는 지금 어느 쪽에 서 있을까? 진짜 잘 사는 사람은 돈은 없지만 열등감 없이 자기 삶의 속도를 지키는 사람이고, 못 사는 사람은 돈이 많더라도 끊임없이 타인의 삶을 기준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나는 분명 잘 사는 사람이다.


나는 여전히 흙수저일지 모르지만, 더 이상 가난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고난의 시간을 조용히 겪어내며 아주 조금은 더 단단해진거 같다. 나의 이런 당당함 덕분인지, 우리 아이들은 남의 시선에 흔들리기 보다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아이들로 자라 준 것 같다. 그것이 내가 아이들에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이 아닐까 싶다.


나는 척박한 흙뿐인 땅에 스스로 씨앗을 뿌리고 정성껏 물을 주고, 이제는 그 열매를 맺게 하고 싶은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내 손으로 일궈온 이 삶이, 그리고 나의 '흙수저'가 참으로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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