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20대였던 90년대, 부산 남포동 쇼핑가 길가에는 새점을 봐주시는 분이 계셨다. 늘 같은 자리에서 새집 하나를 곁에 두고 앉아 계셨는데, 하루는 재미 삼아 친구와 함께 새점을 보게 되었다. 그분은 새장에 있던 새 한 마리를 나오게 하더니, 통에 들어있는 종이 중 하나를 뽑게 했다. 새가 고른 그 종이에 적힌 글이 바로 나의 운세라고 했다.
그분은 종이를 펼쳐 보더니 나를 빤히 바라보며 딱 한마디를 던지셨다.
"외국에 나가겠네"
순간 마음을 들킨 거 같아 깜짝 놀랐다. 당시 내 마음속에는 이미 외국으로 나가고 싶다는 열망이 넘치듯 출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교 4학년 때, 변화가 절실하다고 느껴 한 한기를 휴학했다. 쉬는 동안 영어 공부라도 제대로 해보자는 마음으로 여름방학에 부산대 대강당에서 열리는 토플 특강을 신청했다. 수업의 인기가 그렇게 대단한 줄 모르고 신청했는데, 첫날부터 수업을 들으러 온 학생들로 대강당이 미어터질 정도였다. 나는 겨우 뒷자리 구석에 자리를 잡고 수업을 들었다.
그날, 나는 정말 번개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영어를 이렇게 재미있고 쉽게 가르치는 선생님은 처음이었다. 단발머리에 크고 까만 뿔테안경을 낀 중년의 여강사였는데, 마이크를 통해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투박하고 쉰 듯한 허스키 보이스였다. 자그마한 체구였지만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는 강의실 전체를 단숨에 압도했다. 그녀는 어렵게만 느껴졌던 토플을 독특한 화법으로 명쾌하게 설명해 주셨다. 이후, 나는 마치 신세계를 맛난 것처럼 영어 공부에 푹 빠져버렸다.
무언가에 아주 깊이 몰두해 본 기억을 떠올려보면, 온종일 영어만 공부해도 행복했던 그 시절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다른 학생들과 달리 시험이나 취업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는 그저 영어가 좋아서 공부했다. 회화 학원에서 스터디 멤버를 만들어 수업이 끝나고도 다시 모이고, 도서관에서는 혼자 EBS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신기하게도 하루 종일 영어만 공부해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던 때다.
그러다 보니 외국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럴 즈음에 본 새점에서 외국에 나간다는 운세가 나왔으니 얼마나 신기했을까. 마음속에만 품고 있던, 어쩌면 비현실적이라 여겼던 그 꿈이 정말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그때 생겼다.
그 첫걸음이 35일간의 유럽 배낭여행이었다. 처음에는 영어를 너무 하고 싶어 어학연수를 고민했지만, 당시 내 형편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이 문제였다. 결국 나는 배낭여행으로 방향을 틀었다. 90년대는 유럽배낭여행이 막 인기를 끌기 시작해 여자 혼자 여행해도 안전한 곳이 많았다. 자금을 모으기 위해 아파트 모델하우스에서 빨간 유니폼을 입고 고객을 맞이하는 내레이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당시 내레이터들의 페이가 비교적 괜찮아 여행 자금을 모으기엔 제격이었다. 그곳에서 평생 친구가 된 소영이를 만났다. 나의 배낭여행 계획을 들은 소영이는 자기도 너무 가고 싶다며, 선뜻 동행을 제안했다. 혼자서라도 갈 생각이었던 내게 든든한 지원군이 생긴 것 같아 너무나 반가웠다. 우리는 모델하우스 계약이 끝나자마자, 본격적인 여행 계획에 돌입했다.
처음으로 큰돈을 손에 쥐고 8개국으로 떠나는 여행이었기에 계획을 빈틈없이 촘촘하게 세워야 했다. 유로화가 없던 시절이라 나라별로 환전을 하고, 유레일패스를 샀다.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현금을 지키려 옷 속에 차고 다닐 복대도 준비했다. 그해 여름, 우리는 드디어 유럽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첫 도착지인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던 그 순간이야 말로 내 청춘의 진짜 여름이 시작된 지점이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열정적이었던 인간 '주정희'가 그곳에 있었다. 영국에 도착했을 때의 감정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던 영어를 쓰는 나라,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선선한 여름 날씨, 자유로운 거리와 서구적인 건물들. 모든 것이 낯설면서도 또 이상하리만치 내게 익숙하고 편했다.
하지만 런던의 낭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첫날부터 우리는 벽에 부딪혔다. 숙소 예약과정에서 오해가 있었던 것이다. 분명히 프런트에 배낭을 맡기며 예약을 마쳤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예약시간이 따로 있으니 그때 다시 오라'는 말을 잘못 알아 들었던 것이다. 이미 예약시간은 훌쩍 지나 방은 다 차버렸고, 밤늦게 돌아온 로비에는 우리 배낭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낯선 땅에 어느새 깜깜한 밤이 찾아왔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다시 거리로 나선 그 순간이 가장 아찔하고 무서웠다. 가로등 불빛 아래 종이 지도는 잘 보이지도 않았다. 한참을 헤맨 끝에 겨우 찾아낸 곳은 비싼 가격의 트리플 룸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돈을 지불하고 침대에 몸을 눕히는 순간, 꾹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마치 청춘의 첫 번째 신고식 같았다. 그 아찔했던 밤을 버티고 다음 날 아침 런던의 햇살을 마주했을 때, 전날밤의 두려움은 눈녹듯 사라지고 어제보다는 조금은 더 단단해진 나를 발견했다. 마치 인생의 첫 실패에서 쓴맛을 본 뒤 비로소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처럼 말이다.
가난한 여행자였던 우리는 종이 지도 하나에 의지해 길을 헤맸다. 기차를 반대 방향으로 타는 실수를 하기도 하고, 물집이 터지도록 계속 걸어야 했지만, 그마저도 나는 행복했다. 소영이는 내가 길을 너무 잘 찾는다며 "너 여기 살았던 사람 같아"라고 말하곤 했다. 골목골목을 누비며 길을 찾을 때는 큰 희열을 느꼈다.
숙소에 도착하면 발에 물집이 잡히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고, 그날의 빨래를 마무리한 후 간단한 저녁을 만들어 먹었다. 자기 전엔 다음날 일정을 살피며 미리 지도로 길을 확인하고 기차 시간을 체크했다. 아침이 밝으면 또다시 길을 나선다. 그렇게 한 달 만에 우리는 진정한 배낭여행족으로 거듭나 있었다.
이탈리아 로마에 도착했을 때는 가장 무더웠던 날이었고, 뜨거운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서 우리를 따라 다녔다. 늘 함께하는 배낭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도 오드리 헵번의 영화 "로마의 휴일"을 떠올리며 명소들을 하나하나 둘러볼 때면 힘든 시간은 까맣게 잊혔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 도착했을 때는 출렁이는 강물을 바라만 보아도 피곤이 날아갔다. 수상버스인 바포라토를 타고 다니며 시원한 바람을 맞을 때는 천국이 따로 없는 것 같았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길 찾는 데 도사가 된 나는 미로 같은 이탈리아 골목을 신나게 누비고 다녔다.
유럽여행 한 달 동안 고난과 희열, 인내와 극복을 모두 경험했다. 그 경험치는 실로 엄청났다. 인생에서 이런 여행을 해볼 수 있었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고, 이후 내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깊은 영향을 주었다.
지나고 보니 그 한 달은 내 20대와 30대의 삶을 압축해 놓은 듯하다. 길을 잃고 헤매다 겨우 찾은 숙소의 안도감, 물집 잡힌 발을 씻어내며 배낭의 무게를 견디던 인내, 그리고 마침내 마주한 로마의 장엄함까지.
나의 청춘도 로마의 미로 같은 골목을 헤매는 느낌이었다. 노력하고 애쓰고는 있었으나,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불확실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숱한 오답을 채점하며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어깨를 짓누르던 배낭처럼 미래에 대한 중압감이 늘 따라다녔다. 혼자 멀리 동떨어져 있는 듯 했으며, 남들보다 늦게 자리를 잡는 것 같아 불안했고, 내가 선택한 길이 막다른 길일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배낭여행이 가르쳐준 거 같다. 길을 잃어도 직접 걷다 보면 결국 어딘가에 도착하며, 헤매며 보았던 그 풍경만큼은 온전히 내 것이 된다는 것을.
목적지에 가보지 않고는 그 길이 맞는지 알 수 없는 여행처럼, 나의 20대도 일단 부딪히며 나만의 경로를 수정해 나가는 법을 배웠다. 취직은 그리 쉽지 않았고, 미래는 여전히 불안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에는 희망이 있었다. 그 와중에 영어만큼은 놓고 싶지 않았다. 그 집요한 애정과 고독한 시간이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들어낸 시작점이 아니었을까. 해외여행을 꿈꾸던 26살의 내가, 이제는 그 꿈을 넘어 캐나다에 정착해 살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26살 그 뜨거웠던 여름이,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뿌리가 되어 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