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나는 지금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초중고 시절, 무엇을 꿈꾸라고 특별히 요구받아 본 적도, 스스로 간절히 원해본 적도 없었다. 잘해야 한다는 압박도, 더 열심히 하라는 독촉도 없었다. 특히 초등학교 때는 그저 물 흐르듯 주어진 과제나 책임만 성실히 해낼 뿐, 크게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놀기 바빴고, 성적을 올려보겠다는 욕심도 딱히 없었다.
그러다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영이를 만났다. 그 아이는 칠흑같이 까맣고 숱 많은 긴 머리를 앞머리 없이 반듯하게 가르마 타서 양갈래로 길게 땋아 있었다. 마치 조선시대와 현대를 오가는 묘한 분위기였다. 똑 부러지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얼굴엔 옅은 주근깨가 있었고, 앙다문 입술은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차갑고 도도한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은 중학교 1학년 교실에서 단연 눈에 띄었다. 우리는 옆자리에 앉자마자 친구가 되었고 그 후로 마치 영혼의 단짝이라도 만난 것처럼 매일 붙어 다녔다. 첫인상과는 달리 웃긴 농담을 하면 주근깨가 펴질 만큼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늘 붙어 다니는 데다 외꺼풀 눈매까지 비슷해서, 선생님들이 둘이 혹시 자매냐고 묻기도 했다.
가끔 영이네 집에 놀러 가면, 그 아이는 태어나서 한 번도 자르지 않았을 것 같은 긴 머리를 한쪽으로 늘어 뜨린 채 정성껏 머리를 빗었다. 그럴 때의 영이는 더없이 우아한 존재였고 나는 그 아일 동경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다. 피아노 실력도 좋아서 내게 가끔 멋진 클래식 연주를 들려주곤 했다. 민영인 가진 것에 있어 부족함이 없어 보였고, 내가 갖지 못한 능력까지 다 가진 아이 같았다.
우리는 방과 후엔 서로의 집을 번갈아 오가며 함께 공부했는데, 그때처럼 공부가 재미있었던 적은 없었다. 거실에 큰 상을 하나 펴고 마주 앉아서 해가 질 때까지 문제집을 풀었다. 우리는 특히 어려운 수학문제를 힘들게 풀어내는 과정을 즐겼다. 단짝 민영이를 만나며 내 삶에 서서히 공부라는 재미가 들어왔다.
중학교 1학년 내내, 내가 1등을 하면 민영이가 2등, 민영이가 1등을 하면 내가 2등을 하며 서로 1, 2등을 다투었다, 그러면서 둘만의 묘한 경쟁심도 느꼈다. 당시 내게는 별다른 목표가 없었지만, 영이는 자기 오빠처럼 서울대학교에 가는 것이 목표였다. 나도 덩달아 그렇게 목표를 정하고 공부하게 되었는데, 그날 배운 과목들은 무조건 복습하고 다음날 수업까지 예습해 가곤 했다.
우리는 함께 공부하다가도 TV에서 외화 시리즈 '맥가이버'의 오프닝 음악이 들리기 시작하면, 열일 제쳐두고 TV앞에 앉아 꺅꺅 소리를 지르며 맥가이버와 사랑에 빠졌다. 지금도 맥가이버를 생각하면 영이가 동시에 떠오를 정도로 그 시간이 즐거웠다. 라면만 끓여 먹어도 웃음이 나고,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무릎이 다 까져도 깔깔댔다. 영이네 집에 가면 보고 싶은 만화책들이 늘 쌓여있었다. '굿바이 미스터 블랙', '북해의 별',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빌려놓고 바닥에 엎드려 만화책 삼매경에 빠지곤 했다.
우리는 그렇게 함께 한 추억이 너무도 많았다.
그런데,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영이가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면서 멀리 전학을 가게 되었다. 그때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공부를 함께 하던 단짝이 사라지자, 나는 그때부터 공부를 놓아버렸다. 함께하던 시간이 사라지자 공부는 더 이상 재미도 의미도 아닌 일이 되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때까지도 나는 내 삶을 스스로 주도하고 있지 못했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도 꼭 자주 만나자며 눈물의 약속을 했지만, 핸드폰도 삐삐도 없던 시대였으니, 서서히 연락은 뜸해지게 되었고, 그렇게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
영이를 다시 만난 건 대학교 1학년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출범식에서였다. 그 해 출범식은 부산대학교에서 열렸다. 전국의 대학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든 거대한 행사였다. 부산 노래패 연합이 집회 행사를 이끌었고, 나도 부산 노래패 일원으로 단체곡을 부르는 것에 참가했는데 거기서 영이를 발견했다.
무대 아래에서 집회 내내 키보드를 치며 반주를 하던 아이가 영이었다. 트레이드 마크였던 긴 머리는 싹둑 잘라 커트로 변해 있었고, 몸에서는 짙은 담배 냄새가 났다.(그 당시 운동권 여성들은 담배를 많이 피웠다) 그 아이는 이미 운동권의 주축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 거대한 열기 속에서 어딘가 들떠 있었으면서도, 진정한 내 마음속의 이야기는 듣지 못했던 시기였다. 그랬기에 영이가 나처럼 노래패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당혹스러웠다. 나는 늘 영이가 서울대 어느 도서관에 앉아 공부하는 모습을 상상했었다. 세월이 흘러 서로의 변한 모습이 조금은 낯설고 어색했을 것이다. 밤새 라면을 끓여 먹으며 함께 공부를 하던 모습, 맥가이버에 열광하던 기억, 같이 서울대에 가자던 약속이 우리의 마지막이었으니까.
영이는 서울대는 못 갔지만, 부산에서 제일 좋은 대학에 들어갔고,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에게 20대 대학 시절은 정의와 신념이라는 이름으로 길에서 보낸 어두운 터널 같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시대를 비판하며 데모 대열에 합류하는 것이 당연한 정의라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영이 역시 좋은 대학에 들어갔음에도 학업보다는 현장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
세월이 흘러 전해 들은 영이의 삶은 내가 보기에 그리 평탄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똑 부러지던 아이가 졸업 후에도 시위 현장에 깊이 관여하다 취업이 잘 안 되었고, 결국은 남자 혼자 아이 둘을 키우던 집에 입주 가정교사로 들어갔다고 한다. 몇 년 뒤 그 집이 제주도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민영이는 연고도 하나 없는 그곳까지 따라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입주 가정교사로 제주에 내려가 생활하던 영이는 이후 결혼을 하게 되었고, 몇 년 만에 연락이 닿은 나는 영이를 보러 제주도로 내려갔다. 그런데, 결혼식 당일에 만난 영이와 남편 사이에 묘한 갈등이 느껴져서,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결국 영이는 남편과 이혼을 했고 지금은 딸아이와 둘이서 제주도에서 살고 있다.
20살의 우리가 부산대학교에서 다시 마주했을 때의 순간은, 중학생 이후 서로의 인생에서 잠시나마 겹쳐진 유일한 지점이었는지 모르겠다. 영이와 나는 삶의 방향도 속도도 달랐지만, 그때만큼은 잠시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시에, 흘러간 세월의 무게도 함께 느꼈다. 그것은 서로에 대한 실망이 아니라, 이제는 예전의 그 순수했던 날들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의 일종의 체념 같은 것이었다. 꿈 많던 여중생 시절의 우리는 이제 기억 속에서도 한참을 건너가야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었고, 각자의 삶은 너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버렸다.
이제는 영이도 나도 각자 다른 인생의 궤적 위를 제대로 잘 걷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비로소 내 길을 오롯이 바라볼 자신이 생기게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