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다 좋은 기회가 닿아서 캘거리 복지센터와 함께 시니어 분들과 12주에 걸쳐 "자서전 워크숍"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매주 연대별로 그분들의 기억을 꺼낼 수 있도록 돕고, 12주 워크숍 마지막엔 그 글들을 모아 작은 북릿하나를 제작해 드리는 게 목표입니다. 그 첫 번째 글쓰기로 "유년기의 기억"을 써보시라 했는데, 이참에 저도 그분들과 발맞춰 함께 글을 써보기로 결심해서 매주 그 글들을 올려볼까 합니다.
나는 197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해는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때였다. “잘 살아보세”라는 표어가 곳곳에 붙어 있었고, 텔레비전은 아직 흑백으로만 나오던 시절이었다. 사진도 여전히 흑백이 더 흔했지만, 내가 태어난 이후부터는 컬러 사진도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언니와 오빠의 어린 시절 사진은 흑백이지만, 내 백일사진부터는 컬러였다. 형제들 중 유일하게 유치원도 다녔다. 우리 집도 이즈음에는 총 천연색까지는 아니어도, 희뿌연 컬러의 시대로 들어선 것 같다.
아버지는 결혼하신 후 좋은 직장인 한국전력에 취업을 하셨다. 하지만 취업 첫날, 전봇대에 올라가라는 말을 들으시고는 못하겠다고 곧바로 그만두셨다 한다. (이 이야기는 자라면서 엄마에게 귀가 아프게 많이 들었다.) 평소 신사처럼 살며 고생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분이셨다. 아버지는 돈은 없었지만, 늘 신사로 사셨다.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던 시절이었기에 엄마는 그런 아버지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셨다. 늘 절약하셨고, 본인을 위해 허투루 돈 쓰는 법이 없으셨다. 내가 5살 즈음에는 알뜰살뜰 돈을 모아 당구장을 여셨는데 그때 장사가 꽤 잘 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처음으로 셋방이 딸린 단층짜리 단독주택을 장만하시고, 방하나를 세를 주실 수 있었다. 늘 셋방살이로 살다가 이제는 주인집 아주머니가 되신 거다. 나도 그때는 주인집 딸로 살게 되어서였을까. 그 집에서 살던 때가 유년기 시절 중 가장 행복한 시간으로 기억된다.
엄마는 큰 가마솥으로 잼을 만들어주시고, 카스테라도 구워주셨다. 우리 집에 셋방살이하던 아줌마네 막내딸 소연이가 갓난아기였을 때, 아줌마가 부재중이면 내가 소연이에게 직접 분유를 타서 먹이고, 돌봐주기도 했다. 동네에는 또래 아이들이 많아서 골목길에 다 모이면 열명남짓이 되었다. 작대기를 하나씩 들고 큰 아이를 필두로 골목 끝에서 끝까지 우르르 소리 지르며 뛰어다니고 재미있게 놀았다. 다 같이 옥상에 누워 별을 보며 밤을 새우다 비를 맞기도 하고, 여자애들은 자갈돌을 한 사발이나 모아서 흙바닥에다 두고 손가락이 다 까지도록 공기놀이를 했었다. 특히 언니는 동화책을 그림으로 그려 한 장씩 넘겨가며 이야기해 주는 동화 극장을 우리 집 마당에 열었다. 동화 극장 시간이 되면 동네 아이들이 그 좁은 마당에 빼곡히 모여 앉아 집중하며 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시간을 참 재미있어했고, 아이들에게 늘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그렇게 행복하게 지내던 그 집에서는 겨우 4년밖에 살지 못하고 이사를 가야 했다.
당구장이 점점 인기가 많아지면서 서서히 경쟁이 붙기 시작했고, 예전처럼 장사가 잘 되지 않았다. 엄마는 지금 당장 괜찮은 값에 넘길 수 있을 때 팔자고 제안을 했지만, ‘그거 팔면 뭐 먹고사냐’며 아버지가 고집을 피우시다가 결국에는 제값을 못 받고 헐값에 당구장을 팔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힘들게 장만했던 우리 집까지 팔게 되었다.
방 2개짜리 자그마한 2층 전셋집으로 이사하던 날, 엄마는 속으로 눈물을 삼키셨다.
이런 저런 사정을 알리가 없던 나는 그저 마루를 방방 뛰어다니며 새로운 집으로 이사 온 것이 마냥 신나고 좋았다. 그날, 엄마가 이삿짐을 정리하시며 유리잔 세트를 유난히 소리 내며 꺼내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단독주택으로 처음 집을 사서 이사 가기 전까지는 한 지붕 아래 세 가구가 사는 집에 살았었다. 지붕이 여러 개 붙어 있는 구조였고, 집 앞에는 조그만 시멘트 마당이 있었다. 그 마당 한가운데에는 큰 우물이 하나 있었다. 어린아이가 까치발을 하고 그 우물을 들여다볼 때면, 끝없이 깊은 심해를 보는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한 번은 그 우물에 개 한 마리가 빠져서 큰 소동이 난 적이 있다. 그때 온 동네 남자 어른들이 힘을 합쳐 개를 양동이에 담아 끌어올리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 우물에는 나무로 만든 뚜껑이 덮였다.
부모님이 매일 당구장에 나가셔야 했던 시절, 오빠는 학교에 가고, 언니와 나는 단칸방에 남아 둘이서 놀았다, 그 당시는 손가락을 동그란 구멍에 끼우고 끝까지 돌렸다가, 찰칵 소리를 내며 제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숫자 다이얼 전화기가 있었다. 당구장이 집 바로 옆 건물이었지만, 엄마는 여자아이 둘만 집에 두는 게 걱정이 되어 까만색 다이얼 전화를 사놓으셨고, 우리는 낮에 엄마에게 자주 전화를 걸던 기억이 난다.
1977년 무렵, 당구장 장사가 제법 잘되자, 아버지는 커다란 일제 카세트 하나를 사 오셨다. 당시 그만한 크기의 일제 카세트는 보통 월급쟁이 몇 달 치 월급과 맞먹는 고가였기에, 평소에는 장롱 깊숙이 넣어 두었다가 카세트를 틀 때만 꺼냈다. 그 카세트는 우리 집의 보물 같은 귀한 물건이었다. 웬만한 서류가방보다 더 크고 묵직했으며, 전면은 은색 메탈로 덮여 있어 아주 고급스러웠고, 상단에는 큼직한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인기 있던 만화가 시작되면, 오빠랑 함께 TV 앞에 카세트를 바짝 갖다 대고 숨죽이며 만화 주제가를 녹음하던 기억이 난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어느 날, 언니와 나는 집에 둘만 남아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때 커다란 우산을 쓴 여성 한분이 까만 치마를 입고 문을 두드렸다. 집은 단칸방과 부뚜막이 있던 구조였는데, 우리가 "누구세요?”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그 아줌마는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들어와 우산을 접었다.
엄마 친구라고 하셨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었지만, 엄마 친구라고 하니 우린 별 경계심 없이 손님을 맞았다. 엄마가 카세트를 빌려주시기로 했다며 그걸 가지러 왔다고 했다. 우리 자매는 아무 의심 없이 장롱 깊숙이 넣어둔 카세트를 꺼내 드렸고, 친절하게 가방까지 찾아 드렸다. 그분은 나가려다 다시 들어와 테이프도 빌리기로 했었다며 집에 있던 유명한 팝송과 가요 테이프를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찾아서 챙겨 갔다. 언니와 나는 부엌까지 따라 나가 90도로 인사를 하며 그분을 배웅했다.
그렇다. 그녀는 도둑이었다. 아주 능숙한 도둑.
그날따라 엄마랑 늘 통화하던 까만 전화기가 왜 이리 쓸쓸해 보이던지. 전화 한 통으로 확인만 했어도 카세트를 그렇게 허무하게 보내지는 않았을 텐데.
조용한 동네에서 그 사건은 워낙 큰 일이어서, 온 동네 이웃집 아주머니들이 몰려오고, 경찰 한분도 우리 집에 조사를 하러 오셨다. 당시 7살이던 언니에게 그 여자의 얼굴을 기억나는 대로 그려보라고 했다. 내 머릿속에는 그 여성의 이목구비가 지금까지도 선명하지만, 그것을 어찌 그림으로 그릴 수 있을까. 언니는 그림을 꽤 잘 그리는 편이어서 비슷한 느낌으로 입은 옷과 인상착의를 그리긴 했지만, 엄마는 누군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고, 결국 그 도둑을 찾을 수는 없었다.
우리 집 장롱 깊숙이 숨겨둔 보물을 어떻게 알고 왔을까?
결국 우리 집 가보는 그렇게 허무하게 우리 집을 떠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