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레아 Jan 13. 2019

낙엽 하나,
느리게 살아도 좋다 (1)

뭐든 어떻게 되든 좋다는 느낌으로


“여길 어떻게 오게 된거야?" 


옆 테이블에 있던 비키가 다가와 물었다. 그리스의 수많은 여행지를 두고 왜 하필 이 섬에 왔냐는 거다.


"이카리아섬의 사람들은 아주아주 오래 산다지? 그래서 죽음을 잊은 섬이라고 불린다고. 근데 그 비결이 ‘술 잘 마시고, 잘 참견하고, 게으르고, 잠 많이 자고’ 라니 너무 재미있잖아. 진짜로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었어."


“잘 찾아 왔네. 그 말대로야. 여기서는 오늘을 살지. 그냥 오늘 좋은 걸 해. 놀고 싶은 대로 놀고. 

봐, 지금 아무도 안 들어 갔자나.”

비키는 새벽 한 시가 되도록 바에 앉아 술을 마시며 여유롭게 떠드는 동네 사람들을 가리켰다. 정말 그랬다. 마을은 아주 작은데 밤늦게까지 카페가 이렇게 바글바글하다니 동네사람들이 다 나온건가 싶을 정도였다.


“스트레스가 없어. 모든 게 느리지. 우리는 시계가 없어. 이것 봐.”

그녀는 자신의 팔뚝을 걷어 올려 팔에 아무것도 없는 걸 보여준 후, 옆의 친구들 팔뚝마저 보여주었다.


“얘도 없어, 얘도 그렇고.”


한 명만 시계가 없으면 우연인가 싶을 텐데 그 또래의 친구들이 똑같이 없으니까 정말인가 보다 싶다. 


“해가 우리 시계야. 음, 밝으니까 낮이군. 음 어두워 저녁이야. 

배가 우리의 시계지. 배가 고프네? 그럼 밥을 먹고." 


웬 조선시대 사람들 생활사 같다 싶어 헛웃음이 났다. 그러고 보서니 낮에도 느린 이들의 진가를 체험했던 차였다. 


“아까 오후 세 시 쯤인가… 여행사에 갔더니 문이 닫혀 있더라고. 물어보니 저녁 7시에 연다는 거야. 엄청 놀랬어.”


“아마 거긴 오전에 두 시간, 저녁에 두 시간쯤 열 걸?”


“뭐? 4시간만 일한다고? 한국에선 상상도 못 할 일이야!” 

나는 기가 차서 웃고, 그들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주 느림. 심각할 정도로 느린 것을 표현하는 말이 있다고 했다. 바로 ‘훌랄라’. 뭐든 어떻게 되든 좋다는 느낌으로 '훌랄라~'하며 리듬을 타면 된다.


“후울랄라~”


그들을 따라해 봤다. 마치 해초가 물 안에서 흐느적거리듯 몸을 축 늘어뜨리고 흐름을 타면 된다. 단지 몸에 힘을 뺀 것 뿐인데 긴장이 풀리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테이블에 놓여있는 촛불도 하늘거리는 나뭇잎도 모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 여유롭게 움직이는 듯 했다. 복잡한 문제들도 훌랄라 한 방이면 ‘아, 몰라 일단 내려놓자.’ 는 마음이 될 수  것 같았다. 


아주 느리다는 의미가 '말'로서 존재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이곳이 '느림'이라는 생활방식이 기저에 깔려 있고, 그들 정서의 하나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빨리빨리'라는 단어가 훨씬 익숙했다. 여행중에도 수퍼마켓이든 패스트푸드점이든 종업원의 느린 손놀림에 마음 속으로 '빨리빨리'를 외치며 답답해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나로서는 '훌랄라'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마치 거대한 두 정서의 빙하가 부딪치는 것 같았다. 이 엄청난 충돌은 나에게 '지금껏 당연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여행 온거야? 회사는 어쩌고?”


“음, 오랜 여행을 하고 싶어서 회사를 관두고 마음 가는 데로 걷고 있어. 벌써 5개월째 인걸.”


“아아아아~”


그들은 알았다는 듯 하나같이 느리고 길게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 모습에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푸하하! 너네 말투랑 제스쳐까지 느리구나? 보통은 ‘아’할 걸, ‘아아아아~’ 하잖아! 고개까지 이렇게 돌리면서.”

과장을 20%쯤 붙여서 그들을 따라하며 놀렸더니, 그들도 멋쩍어 하며 따라 웃는다. 


“네가 우리 동네에 왔다는 거, 아침부터 알고 있었어.“


“내가 온 걸?” 


“응. 이미 소문이 다 났는걸. 차이니즈 걸이 돌아다닌다는 거야. 이 마을은 유명하지도 않고 너무 작아서 아시아인이 오는 일은 거의 없으니까 특별한 일이지. 우린 이것저것 다 얘기하는 편이야. 친구한테 코리안 걸이라고 다시 말해줘야 겠네.”


순간 머릿속에 스쳐가는 장수비결! ‘남 일에 잘 참견하고, 사사건건 얘기한다!’ 진짜 였다니. 자취한지 3년이 지나도록 내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나로서는 가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정도로 사소한 것도 서로 얘기하다니. 그러고 보니 참견을 잘한다는 말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내 일처럼 여기고 친구나 이웃에게 스스럼없이 얘기하는 것을 말하는 지도 몰랐다.


'이곳 사람들은 외로울 틈이 없겠구나.'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얘기하며, 그것도 모자라 더 얘기하려고 밤늦게까지 동네 카페에 나와 수다를 떨고 있는 비키와 그녀의 친구를 보며 생각했다. 혼자가 익숙하고 편한 우리들은 외로움을 응당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했다. 사람을 피해 혼자 있을 때 안식을 느끼기도 했다. 회사에서 돌아온 후에야 비로소 나다워 진다고 느끼곤 했다. 흥미로웠다. 내가 지냈던 곳과 다른 방식으로 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신선한 바람을 쐬는 듯한 기분이었다. 


다음날은 나도 참견쟁이가 되어 보기로 했다. 비키가 자신이 가르치는 학교에 가서 보조교사가 되어 보지 않겠냐고 한 것이었다.


"정말 그래도 되는거야?"


"물론이지!"


"괜찮은 거야? 나는 낯선 사람이고... 음, 학교에 미리 허락을 받는게 필요할 수도 있고..."


즉흥적으로 제안하는 비키를 보고 괜시리 걱정이 되어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내 우려을 단 한마디로 일축했다.

"아이들이 좋아할거야."


뒷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선생님은 학생들을 위해 그들이 좋아할 만한 걸 하면 되었다. 명쾌했다. 이 간단한 논리가 이상스러울만치 낯설었던 건 왜일까. 그남 밤 대화는 나와 내가 가진 틀에 수많은 물음표를 남겼다. 


'해보자. 나도 아이들을 만나고 싶고, 아이들도 나를 만나면 즐거울거야'


단순한 생각으로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그녀 방식대로 생각해 보자니 뭐 하나 거리낄 것이 없었다. 두렵고 떨렸지만 그 또한 괜찮았다. 나에겐 마법의 주문이 있으니. 훌랄라, 한 번 외치고 느긋하게 마음 먹으면 뭐라도 어떻게든 되어 있을 테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낙엽장수의 하루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