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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레아 Jan 13. 2019

낙엽 셋,
사랑이 그곳에 있어 주어서 (2)

사랑이 모인 밤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콜린이 물었다. 그는 유럽의 전 나라를 돌아다니며, 만나는 각국의 사람들에게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는지를 묻고 기록한다고 했다. 사랑의 정의라... 감각 속에서만 존재하는 단어의 의미를 언어라는 도구로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은 내 기억에 질문을 던지는 일이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사랑의 정의를 듣는 것은 그 사람의 소중한 경험과 만나는 것이기도 했다.


콜린이 펼쳐 보여준 몇십 장의 폴라로이드 사진에는 유럽 각지에서 만난 여행자들이, 그리고 뒷면에는 그들이 생각하는 사랑의 정의가 빼곡히 기록되어 있었다. 폴라로이드 사진 속 얼굴들은 저마다 조금씩 상기되어 있었다. 설렘이랄지, 만족스러움이랄지, 혹은 작은 비밀을 내보인 이의 부끄러움이랄지, 뭐 그런 감정들이 담겨.


'지잉'하고 콜린의 사진기에서 내 얼굴이 희미하게 담긴 필름이 나왔다. '후후' 불며 어색하게 웃는 내 모습을 현상한다. 콜린이 펜을 건네며 말했다.


“한국사람은 처음 만나. 아시아인은 굉장히 드물거든.” 


콜린이 나의 희소성을 언급하는 바람에 아시아인을 대표해 그럴싸하게 적어야 할 것만 같은 부담이 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남녀노소를 불문한, 전 우주적이며 차원을 넘나드는,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그런 위대한 사랑의 정의! 를 생각해내 보려 했지만, 그런 게 내게 있을 리 없었다.


눈을 감았다. 진실이 집중되었던 삶의 어느 시점을 떠올린다. 그 안으로 휘적휘적 손을 저어 가장 마음에 맞닿아 있는 말을 끄집어낸다. 사랑에 빠진 나는 웃고 있었다. 딱히 재미있을 것도 없는데 신이 나 있었다. 그의 말, 제스처, 습관 하나에도 히죽거리고 있었다.  말을 어렵게 하는 법을 모르는 나는 그대로 옮겨 적었다.


"Talking to him, I smile. Maybe I’m in love."

나 그 사람이랑 얘기하면 웃게 돼. 아마 사랑하는 것 같아.


콜린은 적힌 문장을 보더니 공감하며 맞장구를 쳤다.   

“그것 참 단순하네. 마음에 들어!”


나는 끄덕이며 대꾸했다.

“사랑은 복잡하지 않은 것 같아. 사람이 복잡하지.”


“콜린, 너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이번엔 내가 물었다. 

콜린은 사랑하는 무언가를 바라보듯 폴라로이드 안의 사람들과 눈을 맞추며 대답했다.


"아직 모르겠어. 그래서 묻고 다니는 것 같아. 근데 한 가지 확실한 건 사랑은 어디에나 있다는 거야."



놀랍게도 그는 히치하이킹만으로 유럽횡단을 하고 있었다. 스웨덴에서 시작해 장장 50시간이 넘는 동안 차를 얻어 타며 덴마크, 독일,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우크라이나를 거쳐 지금 루마니아 남쪽의 부쿠레슈티까지 돌아 돌아왔다고 했다. 콜린은 안주머니에서 여러 겹으로 접혀있던 지도를 펼쳐 보여주며, 어떤 경로로 어떤 사람들을 만나며 이곳까지 왔는지, 그리고 왜 이런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말해주었다.


콜린이 유럽횡단을 시작한 지 채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여행길에서 만난 친구가 돈이 든 가방을 훔쳐 달아났다고 했다. 그는 배신감에 휩싸였고 망연자실했다. 하지만 그는 사람으로 입은 상처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자신이 겪은 상황이 특별한 상황이며,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고 사실은 사랑을 품은 사람들이 더 많다는 자신의 생각을 믿기로 했다. 그래서 빈털터리로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히치하이킹으로 여행을 계속하기로 마음먹었다. 사람을 못 믿겠다고 픽 뒤돌아서 마음을 굳게 닫아버리는 대신, 오히려 마음을 활짝 연 것이었다. 그때부터 콜린의 여행의 목적은 '어디에 가느냐'가 아니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며', '어떻게 가는지'였다.  행선지는 도로에서 만난 차에게 맡겼다. 


그렇게 시작된 도로 위의 만남을 통해, 콜린은 자신이 가진 믿음을 스스로 증명해 내고 있었다. 덴마크 고속도로에서 어떤 여성 운전자가 자신을 태워 주었는데 그는 차에 올라타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차에는 두 살 된 아기가 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을 길에서 태웠다간 자신의 아기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콜린은 난생처음 보는 자신을 대체 뭘 믿고 태웠는지 아직도 의아하다고 했다.

콜린은 모든 운전자를 향해 밝고 명랑한 몸짓으로-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바보같이 양팔을 마구 흔들고 방방 뛰어대며- 인사했다. 자신을 무심히 지나치는 차에게도 ‘잘 가! 바이 바이!' 하며 신나게 손을 흔들었다. 놀랍게도 어떤 차는 그냥 지나쳤다가, 여전히 자기 차를 향해 밝게 인사하는 그를 보고 되돌아와서 태운 적도 있다고 했다.


콜린이 열을 내어 그들이 베푼 사랑에 대해 얘기하는 동안, 사랑의 향기가 방에 그득히 차올랐다. 아기 엄마가 뭘 믿고 그를 태웠는지 알 것 같았다. 그의 표정과 몸짓에서 뿜어져 나오는 밝고 건강한 에너지가 차 안까지 단숨에 전해졌으리라. 


콜린이라는 사람, 그리고 그의 온 발자취가 사랑으로 채워져 있는 것 같았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물으며 자신의 사랑의  정의를 찾고 싶어 하고, 누군가의 사랑이 있어야만 계속될 수 있는 여행을 한다. 그리고 여행하며 만난 사람들에게 그가 품은 사랑을 전한다. 어쩌면 그에게 사랑은 늘 함께 있고 당연한 것이라서 무엇인지 정의 내리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자신을 정의 내리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운 것처럼.






“사랑은 복잡하지 않은 것 같아. 

사람이 복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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