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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레아 Jan 13. 2019

낙엽 둘,
나에게 귀를 기울이다 (1)

걷기로 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절망하던 때에 긴 여행을 결심했다. 소중히 지켜온 꿈이 산산조각 나 버렸고, 나를 지탱해주던 것들은 되려 짐이 되어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모든 것이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일처럼 여겨졌고, 단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다. 긴 시간을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문득 눈앞에 막힌 벽만 보고 있다간 영영 주저앉게 돼 버리고 말 거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미로를 풀지 말고 미로 밖으로 나가자.’ 


떠나기로 했다. 매일 살고 있는 집, 동네, 직장, 이 울타리 밖으로 나가기로 한 것이다. 내가 애초부터 없었던 곳으로 가서 그곳에서 깨져버린 것들을 붙이겠다고 마음먹었다. 큰 조각을 찾아 시작해야 할지, 모서리 조각부터 찾아야 할지, 특이한 모양의 조각부터 시작해야 할지 여전히 모르지만, 일단 눈앞의 조각 하나를 집어 들기로 했다.

워커의 끈을 꽉 조였다. 고된 걸음이 계속되는 곳, 산티아고 순례길로 향했다. 길이 답을 말해줄 리는 없지마는 조금이라도 도움을 베풀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걸음을 떼었다.


새벽을 걷는 사람들 틈에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아직 깨지 않은 어둠이 가로등 밑에서부터 서서히 물러났다. 고요한 골목에는 옷자락이 사락사락 스치는 소리와 순례자들의 발걸음 소리가 낮게 울렸다. 지나는 발밑에 순례길의 이정표인 조개 타일이 눈에 띄어 ‘내가 정말 여기에 왔구나.’하며 뿌듯한 숨을 내뱉었다. 저만치 앞에서 큰 배낭을 위풍당당 짊어지고 저벅저벅 걸어가는 순례자들의 뒷모습이 숭고해 보여 나와는 다른 무리처럼 느껴졌다.


어깨에는 묵직한 배낭이 며칠간 생활할 옷 가지랑 용품을 가득 담고 매달려 있었다. 당분간 거리를, 들길을, 언덕을, 돌길을, 걷고, 걷고, 걷는 동안 나와 한 몸처럼 지낼 녀석이었다. 이 가방 하나를 싸는데도 뺄 것들을 고르느라 고생이었다. 남김없이 내려놨다 싶어도 여전히 미어터지는 짐 때문에 가방을 닫기 어려웠다. 린스 같은 건 애초에 탈락했고 속옷과 양말도 여분 한두 개를 제외하고는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생필품 서바이벌을 한 차례 치르고 나서야 닫히는 가방을 보며, ‘가방이 이만했기에 망정이지, 더 컸다면 그만큼 욕심을 더 채웠겠구나.’ 싶었다. 


<오늘의 할 일 : 걷기>

<오늘의 시간표 : 6:00~ 걷기> 


이처럼 마음 편한 스케줄이 어디 있는가. 그냥 걸으면 되었다. 오래 걸으면 무거워지리라 생각했던 가방은 되려 몸의 일부인 냥, 내 살과 삶의 무게인 냥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앞서 가던 큰 달팽이 한 마리를 만났다. 제 몸보다 큰 고동 모양의 집을 업고 돌바닥을 꾸역꾸역 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평생 제 집을 이고 길 위에서 살아가는 이 녀석이야 말로 순례자들의 모범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달팽이에게 고행 달팽이라는 이름 붙여 주었다.


아스팔트 길이 끝나고 오직 순례자들만 지나는 좁은 언덕길에 접어들었다. 고르지 않은 긴 길이지만 언덕을 지나다 보면 풍경이 연두에서 노랑으로, 노랑에서 초록으로 때때로 변해주어 그때마다의 운치를 느끼게 해 주었다. 두 시간이 넘어가자 다리와 발가락이 고단해졌지만 쉬지 않기로 했다. 다리를 계속 움직이는 것이 좋았다. 풍경에 변화가 생기는 것도, 긴 순례자의 선 중에 점 하나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무엇보다도 이불속에서 울고 있었던 내가 이곳에 날아와 능동적으로 걷고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언덕은 생크림 같은 구름을 잔뜩 얹어 마치 케이크 같았다. 꼭대기까지 오르면 달콤한 크림 안에서 달디 단 휴식을 즐길 수 있으리라는 기대마저 들었다.



‘꼭대기라는 것은 참 대단하지 않은가. 존재만으로 그곳에 도달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하다니.’ 


꼭대기는 신이 작은 꿈들을 심어주려고 만든 배려의 산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헥헥 대며 첫 고지에 오르자, 구름 섞인 바람이 불어왔다. 


“에취!”


순간 찬 기운이 몰려와 재채기가 나왔다. 

고작 첫날인 데다 아직도 갈 길이 언덕 아래로 끝없이 보이지만 뭔가 해낸 것 같은 기쁨에 배낭을 내동댕이쳐버렸다. 신발도 양말도 벗어버리고, 발가락을 꼼지락 대며 온 몸으로 언덕의 바람을 환영했다. 


신나 하는 발가락을 보며 벗어버릴 수 있는 짐과, 벗지 못 하는 짐에 대해 생각했다. 늘 지고 있어야 하는 것인지, 사라지는 것인지, 그냥 일부가 되는 것인지, 조금 전에 만난 순례자 선배, 고행 달팽이에게 묻고 싶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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