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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레아 Jan 13. 2019

낙엽 둘,
나에게 귀를 기울이다 (3)

내려놓기를 배우다


걸음이 막혔을 때,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돌려야 할 때, 어쩌면 그제서야 고집으로 가득찬 마음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틈이 생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릎이 욱신거려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자, 새로운 생각이 생각지도 못했던 풍경과 함께 내게 들어왔다. 잠자코 있던 마음이 한 발짝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 무릎 상태를 보니, 하루에 계획한 23km는 커녕 그 반만큼도 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나갈 채비를 마치고 숙소 계단에 가만히 앉아 그저 출발하는 행렬을 눈으로 배웅할 수 밖에. 다음 마을에 닿기 위해 이곳을 떠나고 그곳에 이르면 또 다음 마을로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걷기 위해 여기에 왔고, 걷기 위해 무거운 짐을 맨다. 뭉클한 마음으로 뒷모습을 응원하고 있으려니, 무릎 걱정은 어느새 밀려나고 ‘이곳에 몸담은 이상 걷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순례자라면 응당 아픈 팔과 다리를 끌고 이겨 내야지!’ 하는 꺼드럭거리는 마음까지 들어 천천히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들길로 나오니 햇살이 어제보다 밝고 기운찼다. 다음 마을에서 병원을 가거나 약국에서 약을 받으면 펄펄 걸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패기도 잠시, 출발한 지 십오분이 채 지나지 않아 무릎이 찌릿거려 왔다. 지도를 제대로 안 챙긴 탓에 다음 마을까지 얼마나 걸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한 쪽 다리를 질질 끌고 걸어봤지만 이대로 긴 길을 갈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전까지 순례자 명단에 내 이름을 올리는 상상을 하며 뿌듯해하던 나는 어디로 가고 ‘에라 모르겠다’를 외치고 그 길 수풀에 철퍼덕 앉아버렸다. 좋아하는 만화책에서 얘기했던가, 포기하면 편하다고. 



놀랍게도 이때부터 몸의 편안함 뿐 아니라 마음의 편안함이 찾아왔다. 갈대가 왔느냐고 기분 좋게 손을 흔들었다. 느린 바람 사이로 크고 작은 풀들이 저마다의 리듬을 타고 있었다. 줄지어 지나는 개미의 행렬이 보였다. 그 무리의 하나가 되어 뒤꽁무니를 쫓아 크고 깊은 수풀 사이로 들어가보았다. 커다란 바위에 올라 꼭대기에서 음하하 웃어도 보고, 앞 뒤 개미 몰래 나르던 먹이를 한 입 베어 먹기도 했다. 도시락 까먹는 기분이라며 혼자 낄낄 웃었다. 바닥에 벌렁 하고 드러 누워 하늘과 눈을 맞췄다. 바람이 내가 능선인 줄 알고 넘는다. 바람인지 머리카락인지 그게 간지러워 또 웃었다. 지나가는 순례자들은 내 옆을 지나며 하나같이 ‘좋아 보인다!’, ‘안녕 좋은 아침이야!’ ‘벌써 숙소에 도착했니?’ 하고 장난이다.


사람과 바람, 그리고 하늘, 풀, 나무, 땅, 개미.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좋은 힘과 기운을 줘서 어느새 무릎 아픈 것도 잊고 마음으로 훨훨  날고 있었다. 그간의 걱정은 땀방울이 바람에 씻겨 날아가듯, 가볍게 증발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 안에 있잖아. 사랑스러운 것들로 둘러싸여 있잖아. 나를 상처주었던 것들은 단지 이 세상의 일부에 지나지 않아. 내가 존재하는 이 큰 우주, 그 안에 점처럼 작은 것이었을 뿐이야. 점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만 바라 보면서 발을 동동 구르던 내가, 힘을 풀고 주변을 보니 내가 사랑하는 것들로 가득 차있구나. 당연했던, 알고보면 소중한 것들 말이야.'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움을, 내가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고 있음을 이제서야, 이렇게 멈추어서야 알게 되었다. 







                                                       너도

                                        거기 있었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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