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적어보는 것은 도움이 된다.

치앙마이 별 거 없는 일상이지만.

by 레아리

우리들의 하루는 서있고, 눕고, 걷고, 앉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단순한 몸 움직임의 반복, 게다가 장소까지 한정되어 있다면 하루와 일주일과 한 달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눕고 싶다.

내가 지내는 곳 치앙마이. 이 작은 동네에는 갈 곳도 할 것도 많지만, 나의 행동반경은 여전히 좁기만 하다.

사람이 많은 곳을 별로 좋아하는 성향이 그 첫 번째 이유.
두 번째는 해외에서 혼자서는 (거의 절대로) 밤에 돌아다니지 않는 겁쟁이 기질. 서른 넘어 갑자기 생겼다.
나는 해가 지기 전 엉금엉금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최대한 가벼운 옷차림으로 책상이나 바닥에 깔린 요가매트에 앉아 짧게 메모를 한다.

딱히 별 일도 없었는데 말이다.



회사를 다닐 때 일과 관련된 노트는 계속 쌓여가는데, 내 일상에 대한 기록은 찾기 힘든 날이 많았다.

일어나서 회사 가고, 회사 가서 일하고, 일하고 퇴근하는 평일의 일상은 무겁고 커다란 덩어리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퇴근 후부터 잠들기 전까지 내게 주어지는 하루의 2-3시간의 자유시간을 잘 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결국에는 피곤함과 귀찮음 때문인지, 내 간절함의 끝은 유튜브를 보거나 예능 프로를 보다가 잠이 드는 것이었다..)


시간 부자 4개월 차인 이 시점에서 알게 된 점이 있다.

회사원의 일상도, 백수의 일상도 드라마틱한 이벤트가 있거나 완전히 새로운 곳으로 장소를 이동하지 않는 이상 나름의 규칙 속에서 덩어리처럼 흘러간다는 것. 새로운 장소로 이동한다 해도 그 또한 일상이 될 거라는 것.
따라서 의식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어제는 뭐했지? 일주일 전에는 뭐했지? 나는 뭘 하고 있지?'가 또렷하게 구분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좋아하는 소설가 김중혁 작가는 하루를 기록하는 것에 관하여 <무엇이든 쓰게 된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기는 쓰지 않는다. 하루를 정리하지도 않는다. 정리할 하루가 없었다. 정리하면 하루는 짧게 느껴진다. 정리하지 않으면 하루는 무진장 길어진다. 어제와 오늘의 구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오늘과 내일도 굳이 나누지 않는다. 해야 할 일을 생각할 뿐이다. 써야 할 글을 생각할 뿐이다. 책을 읽다 보면 문득 내일 써야 할 글의 문장이 생각난다. 중요한 문장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내일 가보면 알겠지. 나는 계속 책을 읽는다.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다. 밤 독서에 어울리는 곡은 디 인터넷의 'Gabby (feat. 저넬 모네)'이다. 책을 읽다가 나는 스르르 눈을 감는다.


하지만 나는 그와 같은 고수가 아니라서 아직은 내 하루를 정리하는 것이 좋다.

하루를 구분하는 것이 좋고 별 거 하지 않은 내가 도대체 얼마나 별 걸 하지 않았는지 관찰하는 것이 좋다. 어떤 날은 낮잠을 자고, 또 어떤 날은 영화를 두 편 연달아 본다. 또 어떤 날은 삼일 연속 같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이런 사소한 것들이 내 일상을 채워가는 것을 기록하는 게 좋다.


80년대생 중 프린세스 메이커 (이하 '프메') 한 번쯤 안 해본 사람이 있을까. (물론, 프메 2의 dd파일을 지우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호기심에 한번 해본 사람이 더 많겠지만.)
10살짜리 딸을 18살까지 키우는 육성 시뮬레이션이다. 18살 생일을 맞은 후 어떤 직업을 갖게 되는지 엔딩을 볼 수 있는 게임. 이런저런 논란이 많았지만 개인적으로는 대학생 때도 가끔 하던 게임이다.

타임 프레임에 맞게 일정을 설정해야한다.

프메 2에서는 달력을 기준으로, 프메 3에서는 가로로 스크롤하는 프레임을 기준으로 그 시간에 뭔가를 해야 한다. 알바를 하든 (알바에도 여러 종류 & 스트레스 레벨이 존재한다), 공부를 하든 (다양한 과목이 있다.) 무사수행을 하든, 아니면 자유시간을 가지든 그것은 유저의 자유에 맡긴다. 그 시간들이 8년 동안 모여 공주가 되기도 하고, 농부가 되기도 교수가 되기도 하고 어둠의 직업을 갖기도 한다.
이 게임 세계에는 분명 말도 안 되는 비약과 한계가 존재하지만 한정된 시간 속의 일상들이 모여 많은 것을 만들어낸다는 아이디어에는 동의한다. 아마 이 사춘기 소녀도 일기를 쓰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상상해본다.




내가 일상을 기록하는 방법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A] & [B]는 매일 아침에 적고, [C]은 생각날 때 적는다. 다 합쳐서 노트 한 페이지면 충분하다.


A. 날짜 적기
빈 페이지 제일 위쪽에 날짜 (2019-04-10-수요일)을 쓰고 현재 내가 있는 장소 (예를 들어 요새는 '치앙마이 우리 집')를 적는다. 아침 커피를 마신다면 카페가 될 때도 있고.


B. 어제에 대해 기록하기
K가 '스몰스텝'이라는 책에서 본 세줄 일기를 우리 나름대로 조금 변형하여 적용 중이다.
(1), (2), (3) 항목에 대해 한 두줄, 혹은 단어로 간략하게 적는다. 5개월째 거의 매일 적고 있다.

(1) 전날을 잠시 돌이켜보고 내 기분이 가장 - 였던 이유를 간단하게 적어보기
(저번 달은 "미세먼지가 너무 심했다"와 "많이 먹어서 속이 더부룩했다"가 가장 많았다.)
(2) 전날을 잠시 돌이켜보고 내 기분이 가장 + 였던 이유를 간단하게 적어보기
(어떤 카페를 갔는데 커피가 너무 맛있었다, 잠을 잘 잤다, 망고가 어마 무시하게 달았다, 어려웠던 요가 아사나를 성공했다 등등)
(3) 오늘 하루 꼭 하고 싶은 한 가지를 적어보기
(책 한 권 읽기, 놀기, 비행기표 예약하기, 디저트 먹지 말기 등- 생각보다 사소한 것들이 하고싶다.)


C. 오늘에 대해 기록하기.

하루를 총 4 블록으로 나누고 간단하게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어디를 갔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등을 간단하게 적어본다.
a. 아침) 기상 ~ 12시
b. 점심) 12시 ~ 오후 4시

c. 저녁) 오후 4시 ~ 오후 8시

d. 밤) 오후 8시 ~ 취침



간단하게 정리된 하루를 돌아보면, 마녀가 살지 않는 과자의 집 앞에 뿌려진 돌멩이를 보는 것 같다.

오늘 하루의 길도 걷다 보니 그 끝에는 편안하게 누워서 잠들 시간이 오는 것이다.

오늘 하루가 행복한 날일 수도 있고 속상한 날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외로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보다 더 많이 즐기고 있구나-라고 새삼 느낄 때도 있다.


하루를 적어보는 것은 도움이 된다.

특히 일상이 별 거 없이 흘러간다고 생각될 때는 더욱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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