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 아이는 꾸깃꾸깃 접혀야만 할까
출근하는 길에 잠시 올리브영에 들렸다. “오늘은 뭘 사지..” 생리대 파동 ‘발암물질 생리대’ 논란 이후 1년이 조금 넘은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당시에 논란이 된 생리대들은 아직까지도 매대에 위치하고 1+1으로 소비자를 현혹한다. 괜찮다고 생각하는 걸까, 거기서 거기라고 다 똑같다고 느끼는 걸까. 그리고 그 사이에서 눈에 띈 ‘순수한 면’. QR코드를 통해 전성분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생리대라고 한다. 모르고 구매했는데 지난 생리대 파동의 선두주자였던 릴리안을 제조한 <깨끗한 나라>의 제품이었다.
지난해 8월 생리대 발암물질 논란이 일었다. 국내 유통 중인 10대 일회용 생리대 브랜드에서 인체에 유해한 휘발성 유기화합물이 검출됐다는 발표에 따라, 생리대를 한 달에 1/4, 약 7일을 사용하는 사용자들의 불안감은 날로 커져갔다. 식약처에서 ‘유해물질은 발견됐으나 인체에 유해한 수준은 아니다’고 발표했지만 믿기 어려웠다.
객관적인 수치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여자라면 너도나도 느끼는 부분이 있다. 유난히 나와 맞지 않는다거나 여느 때와 다르게 몸이 좀 더 힘들 다는 것을. 그리고 그러한 공감대가 가장 많이 형성된 브랜드는 깨끗한 나라의 릴리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약 5천여 명의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깨끗한 나라를 대상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 중이다.
생리대 포비아 이후 새로운 브랜드나 일회용 생리대를 대체하는 대체 상품들은 물론, 유기농 혹은 천연이라는 단어가 명시된 생리대는 폭발적인 수요로 몇 달간 예약을 걸어 놓아야 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그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그때 그 녀석을 다시 파우치에 넣었다. 휴.. 왜 이러고 살아야 하지?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릴리안은 이 상황을 정면 돌파하는 것으로 위기를 관리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계속해서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제품을 선보이며 새로운 노선을 선택했다. 현재 진행 중인 소송에서는 ‘릴리안과 인체 유해’에 대한 직접적인 인과 관계를 증명하라며 전면적으로 나서는 한편, ‘순수한 면 ZERO’을 출시해 위기관리에 힘쏫고 있다.
과거 깨끗한 나라는 ‘릴리안’과 ‘릴리안 순수한 면’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순수한 면’에 ‘릴리안’이 보증*으로 사용되어 부정 연상을 쉽게 일으킬 수 있는 구조기 때문에 현재는 '릴리안'이라는 보증을 버리고 '순수한 면'의 보증을 택했다. 그리고 ‘순수한 면 ZERO’로 제품명을 변경하고 마치 독립 브랜드처럼 제품을 커뮤니케이션하고 있다. 제품만 보면 어느 회사 것인지 알기가 어렵다.
브랜드 보증(Brand Endorsement): 브랜드 인지도를 형성된 브랜드를 개별 브랜드에 사용하여 개별 브랜드의 인지도, 가치 상승을 돕는다. 기존 브랜드의 보증 정도에 따라 크게 강보증(Direct Endorsement), 간접보증(Indirect Exposure), 무보증(Non-Endorsement)으로 나뉜다.
순수한 면 ZERO는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는 인체에 무해한 생리대임을 강조하고 한다. 게다가 제품 한쪽에는 QR코드를 삽입해서 누구나 제품의 전성분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네이밍에서도 BI(Brand Identity)와 패키지 디자인에서도 알 수 있듯이 'ZERO'에 대단한 방점을 찍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생각’ 프로모션이다. 생각이란 ‘생리대에 각을 세우다’의 줄임말로 엄마와 딸이 함께하는 ‘생리대 만들기 클래스’를 제공하기도 하고 www.생각.com을 통해 누구나 생리대에 대한 고민, 걱정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다.
깨끗한 나라는 새로운 제품과 프로모션을 진행하면서 소비자들에게 형성된 부정적인 인식을 탈피하고 믿고 쓸 수 있는 브랜드라는 인식을 확장시키고자 노력 중이다. 결과적으로 현재 논란 중인 소송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화제성과 주목성이 떨어진다면, 위기를 기회로 활용한 우수 사례로 손꼽 힐 수 있겠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왜 할 수 있었던 것을 이제야 하는 걸까? 내 기준에서는 ‘알고 있는데 모르는 척 방관하는 것. 할 수 있었던 것을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다. 사후 방지책뿐인 브랜드 활동은 브랜드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숙제다. 관리할 수 있는 위기 었다면 ‘위기관리’이고 그것을 자기 입맛에 맞게 활용하는 것은 ‘물타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브랜드도 사람이라고 배웠고 그렇게 소통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브랜드의 사회적 도의적 책임은 분명히 있다. 이런 이유로 난 앞으로도 위의 언급한 브랜드나 기존의 대형 유통사에서 새롭게 선보일 제품은 구매하지도 않을 예정이다. 전부터 올바른 생각으로 제품을 제공해온 규모는 작지만 제대로 된 브랜드의 제품과 함께하고자 한다. 나 하나 이런다고 바뀔 것 없겠지만, 가만히 있는 것보단 낫겠지 라고 생각하며.
우리끼리 통하는 말이 있다. 약간 속삭이는 목소리로 눈은 가냘프게 ‘너 그거 있어?’라고 하면 하얗고 폭신한 아이가 꾸깃꾸깃 접혀 내 손에 쥐어진다. 예민한 사람에게는 ‘너 그날이냐?’라고 묻기도 하고, 구매할 때에는 종이봉투나 검정 비닐봉지에 담긴다. 생리는 우리 사회에서 ‘그것’으로 통용되었고
, 창피는 아니지만 굳이 남에게 알려서는 안 되는 존재로 여겨져 왔다.
광고나 커뮤니케이션에측면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광고에서 생리를 하고 있는 여성은, 남자친구와 산뜻한 데이트를 하고 있고 그 남자친구가 '괜찮아'라고 위로해 주는 수동적인 여성으로 그려진다. 다시 말해, 긍정과 부정 중 부정 연상을 더 일으키는 쪽에 능동보다는 수동적인 모습에 가까웠다. 과거에는 제품들이 내세우고 있는 요소들도 ‘흡수력, 냄새 걱정, 그날 걱정’등이 주를 이뤘다면, 생리대 사태 이후 ‘100%면, 순면, 유기농, 인체 무해’ 등을 내세운 신생 브랜드들이 많아졌다. 소비자들이 제품을 바라보는 인식이 바뀌니 브랜드의 KBF(Key Buying Fators)도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영국의 Bodyform 브랜드는 지난해 Blood라는 캠페인을 통해 'No blood should hold us back'이라는 파격적인 커뮤니케이션 메시지를 내세웠고, 이 캠페인은 Cannes Lions를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생리대가 필요 없는 생리 속옷 브랜드인 미국의 Thinx는 과거에는 없었던 적나라하고 솔직한 커뮤니케이션을 진행하고 있는데, 초기에는 뉴욕 지하철에서 광고를 금지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선 언제쯤 볼 수 있을까?
그것을 그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 그것. 아직까지도 누군가는 불편함과 무서움을 무릎 쓰고 사용하고 있고,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는 그런 것조차 없어 학교를 가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