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재미있는 일은 재미없다'는 박승숙 씨(53)
‘미술치료사’.
68년생 박승숙을 지난 20년간 설명해온 단어다. 국내 1세대 미술치료사였던 그는 <영화로 배우는 미술치료>, <미술치료사가 들려주는 미술의 힘>, <나는 그림으로 아이와 대화한다> 등의 단행본을 내며, 미술치료라는 개념을 뿌리내리는데 일조했다.
인터넷서점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해보니 이런 소개글이 뜬다.
“홍익대학교 예술학과와 동 대학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The School of the Art Institute of Chicago에서 미술치료 석사과정을 마쳤다. 20년간 국내에서 미술 치료사로 일하면서 행복하게 글을 쓰고 교육자로 일했다. 현재는 더 중요하거나 더 재미난 일을 하려고 준비 중이다.”
현재 그는 인터넷신문 ‘다시’의 발행인으로, 내년에 개원할 평생교육원 ‘다시배움’의 준비로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고 있다. 그를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인 홍대 앞으로 향했다. 홍대 인근은 그가 평생을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으며, 평생교육원을 개원할 곳이기도 하다.
그가 새롭게 시작하려는 일은 그가 해오던 일보다 얼마나 ‘더 중요하거나 재미난 일’인 걸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던 일을 유지하거나 축소하려고 애쓰는 이 팬더믹 시국에, 그는 어떤 마음으로 새로운 일을 벌이는 걸까?
Q: 20년간 해오신 미술치료 일을 그만두고 ‘더 중요하거나 더 재미있는 일을 하려고 준비 중’이시라고요.
“‘더 재미있는 일’은 실컷 했고요.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을 준비 중인 셈이죠. 미술치료 일을 그만두고 5년 동안 열심히 놀아서 재미는 이제 됐어요.” (웃음)
Q: 5년 동안 어떤 ‘재미있는 일’을 하셨어요?
“단편영화도 만들고, 중남미 여행도 하고, 미국 국립공원으로 캠핑카 여행도 하고… 아버지에 관한 평전도 썼는데, (주: 그의 아버지는 단색화 화가로 유명한 박서보다. 그는 2019년 아버지의 평전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인물과사상사)를 썼다.) 자료조사를 하다 보니 1961년 유네스코가 개최한 파리 세계 청년 화가 대회에 내 아버지처럼 자국 대표로 모인 사람들이 궁금해지더라고요. 2차 세계대전 직후의 혼란과 가난 속에서 어렵게 현대미술을 하던 사람들인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추적해보니 4명의 생존자를 발견할 수 있었고 2명의 유가족과도 연결되었어요. 그들을 만나러 노르웨이, 영국, 아일랜드, 오스트리아, 스위스, 브라질 등에 다녀왔어요. 그러고 나선 코로나 사태가 터져서 날마다 북한산에 쓰레기 주으러 다니고, 친구들과 그림을 그리며 놀기도 했어요. 얼마 전까지는 시나리오 공부하며 극작에 전념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나만 재미있는 일은 영 재미가 없더라고요. 세상에 빚진 것이 많은데 갚을 길 없이 저 혼자 좋다고 놀고만 있으니, 부채감만 커지는 거예요. 맨날 신나고 재밌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우울하더군요.”
Q: 일을 그만두고 여행을 다니거나 등산을 하면서 재미있게 사는 것을 꿈꾸는 분들도 많은데, 재미있는 일로는 벗어날 수 없었다는 선생님의 그 부채감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제가 가진 재능도 그렇고, 좋은 부모 만나 가능했던 배움의 경험도 모두 제게 ‘주어진’ 거죠. 저는 일에 완전히 몰두할 수 있는 환경도 갖춰져 있어요. 아이가 일찍 제 손을 떠나 독립했고, 남편은 뭐든 저 하는 것을 말리지 않는 사람이며, 시댁이나 친정도 저에게 도움을 주면 주었지 제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에요. 모두 독립적으로 알아서들 사는 사람들뿐이에요. 굉장한 행운이잖아요. 이렇게 받은 것이 넘치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뭐든 돌려주는 게 있어야 마땅하죠.
하지만 심리치료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달리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는데 ‘서둘러 찾지 말자. 뱃사공의 마음으로 낚싯줄을 드리우고 자연스럽게 입질이 오기를 기다리자’라고 애써 마음을 다독이며 기다렸어요. 그런데 입질이 오지를 않더라고요. 결국 제 안에 있는 것들에서 저 스스로 결정해서 꺼내야 하는 문제였나 봐요.”
재미있는 일에 몰두하며 그가 보낸 5년을 누군가는 부러워할지도 모른다. 많은 직장인이 ‘퇴사 후 세계여행’ 같은 버킷리스트를 꿈꾸며 하루하루 버텨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박승숙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간이 우울의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연륜과 전문성은 쌓이는데 돌봄과 생계 부양에서는 자유로워지는 시기. 박승숙은 이 시기를 자신을 위한 게 아니라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일에 더 적극적으로 쓰길 원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찾던 일은 파랑새 동화에서처럼 먼 곳이 아닌 자기 경험, 재능, 나이, 관심사, 그리고 자신의 삶 한복판에 있었다.
Q: 지금 <다시배움>이라는 중년 대상의 평생교육원 설립을 준비하고 계시잖아요. 이 일은 어떻게 구상하게 되셨나요?
“아이는 컸고, 갱년기는 왔고, 일은 그만두었는데 늙어는 가고… 저 자신 포함, 저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변해버렸어요. 살던 데로 살고 싶지는 않은데 다시 어떻게 세상에 적응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심리치료사였다고, 제 자신의 변화에 적응하는 게 그나마 제일 쉬웠어요. 나머지는… 다 한숨이 나오더라고요. 일을 뺀 사적인 관계에는 익숙하지 않으니 자꾸 실수를 하고,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사이 젊은 사람들과는 말도 잘 안 통하는 것 같고… 그래서 교육 프로그램을 찾아다녔는데 참고할 게 많지 않더라고요. 중년 대상 프로그램이나 사업은 많아지는데, 대부분 일자리나 취미나 실용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저의 필요에는 잘 닿지 않았어요.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중년의 시선과 태도 변화를 위한 학교 같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Q: 중년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들이 일자리에 초점을 맞춘 경우가 많다고 지적하셨는데요. 그만큼 중년 세대의 관심이 경제활동에 있다는 것인데,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세요?
“저희 세대는 경제적인 것 이외의 다른 것은 생각할 기회가 없었던 세대예요. 전쟁을 겪은 부모님들이 가난한 이 땅에서 일구는 것을 보며 자랐잖아요. 먹고사는 것, 돈 걱정 안 하고 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자랐어요. 하지만 행여 입에 풀칠도 못할까 걱정하며 사는 상황이 더 이상 아닌데, 다른 걸 알지 못해서, 늘 습관적으로 주머니 걱정만 하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 자식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넘겨주고 있는 건가… 책임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물론, 경제적인 부분에 여전히 매달려야 하는 분들을 대변할 수 있는 소리는 아니에요. 당장 매일이 어려운 상황에서는 그것이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또 ‘매일이 어렵다'는 것은 저마다 주관적인 판단을 하는 거라서 뭐라 얘기하기 어렵네요. 아무튼, 뭐든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하려면 생존과 안전은 해결되어야 하죠. 저는 지금 생존과 안전 단계에서는 벗어난 중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요새 젊은이들에 비하면 제 또래는 많이 갖춘 세대잖아요. 열심히 일하면 돈을 벌 수 있는 시대를 거쳐 오늘까지 왔어요. 사회 전체에서 베이비 부머의 숫자는 엄청나죠. 숫적으로 사회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50대와 60대가 휘청이면 사회 전체도 흔들릴 법해요. 그런 우리가 새로운 가치를 모색하며 전환되어 잘 나아가면 이 사회의 많은 부분도 같이 풀릴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그런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점점 더 이자를 불려 가서 재투자를 할 정신적 유산을 후대에 남겨주기 위해 우리가 바뀌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Q: 선생님이 구상하고 계시는 교육 프로그램을 구체적으로 소개해주세요.
“저의 키워드는 ‘전환학습’이에요. 기존의 관점과 시각을 바꾸면 삶이 변화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세상과 시간과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화하기를 바랍니다. 이런 변화를 자극하고 촉진하기 위해서 미술, 극, 무용, 음악, 소통, 연구, 실용 7가지 영역의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어요. 내 이야기로 시나리오를 만들면서 주인공 의식을 갖춰서 결말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한다거나, 가까운 사람에 대해 배워가면서 그들과의 집중 인터뷰를 통해 바이오그래피를 써준다거나, 자신의 삶을 관통한 역사적 사건을 주제로 연구 보고서를 쓰는… 그런 교육 프로그램들을 준비하고 있어요.
Q: 말씀하시는 프로그램이 온라인으로도 가능한가요? 코로나 때문에 많은 교육 프로그램이 온라인으로 대체되거나 연기되고 있잖아요.
“오프라인에 대한 마지못한 대체물처럼 온라인을 바라보면, 저희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할 것 같아요. 오프라인에서 안 되는 게 온라인에서는 되는 것들이 있어요. 그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온라인 그 자체가 장점인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애쓰고 있어요. 디지털 장비나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중년들도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게 하려고 강사진과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구상하고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설명할 때, 그의 얼굴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인간의 변화와 성장을 돕는 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엔도르핀이 도는 것처럼. 그런데 그는 이미 20여 년간 미술치료를 통해 누군가의 변화와 성장을 돕는 일을 하지 않았는가? 그의 말에 따르면 ‘천직이라 여기던’ 일을 그만두고 왜 심리치료가 아닌 교육을 택한 걸까?
Q: ‘인간의 변화와 성장’이라는 목표는 같아 보이는데, 심리치료에서 교육으로 관심을 옮기신 이유가 있나요?
“당사자에게 힘을 부여하는 데 교육이 가진 강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심리치료는 1:1 관계로 혹은 소수 집단에서 치료사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자기 건강을 되찾아 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치료사에게 의존적인 성향을 갖게 되고, 스스로의 힘으로 변화했다고 느끼기보다는 치료사 덕분에 혹은 치료사로 인해 나아졌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요. 치료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 의존도를 약화시키는 또 다른 긴 과정을 가야 해요. 하지만 교육 현장에서는 교사나 스승이 아무리 많은 영향을 주고받아도 근본적으로 그런 관계를 맺게 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전직이었던 미술치료도 원래는 미술교육에서 배태된 겁니다. 초기 미술치료사들은 대부분 교육자였어요. 교육 상황에서 개인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고민하면서 심리치료로 넘어온 거죠. 심리치료는 여전히 사회에 꼭 필요한 영역이지만, 제게는 교육이라는 더 큰 범위가 더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Q: 그래도 국내 1세대 미술치료사로 20여 년간 활발하게 활동하셨는데요. 미술치료 일을 그만둘 것을 결정할 때 마음은 어떠셨나요?
“그냥 딱 그만두었어요. (웃음) 최선을 다 했기에 미련도 아쉬움도 없었어요. 어디에나 길이 새로 나면 그다음에는 밥그릇 싸움이 생기고 정치적인 문제가 커지잖아요? 한 우물을 판 이상, 그 우물 안에 산적한 과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었더라면 좋았겠지만… 제 힘과 에너지를 더 필요한 데 쓰고 싶었어요. 후배들에게는 미안하지만요.
Q: 그동안 쌓아온 커리어와 거리가 있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이 두렵지는 않으세요? 더구나 코로나 시국이라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에 위험요소가 많을 텐데요.
“사실 겁납니다. ‘망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저라고 없지 않아요. (웃음) 제 남편은 그냥 지금처럼 우리끼리 재미있게 살자고, 그래도 된다면서 조용히 저를 말리곤 해요. 하지만 또 한 편에서는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고, 더 늦어지면 새로운 일 같은 건 못한다고, 지금 해보라고 격려하기도 합니다.
저는 위기는 위험이자 기회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어요. 여기가 바닥이라면 잃을 것보다 새로 뻗어가 얻을 게 더 많을 거라고… 지금처럼 답답한 상황이, 오히려 준비된 사람에게는 과감히 창의적인 움직임을 보일 때라고 봤어요. 전 5년간 쉬면서 준비했으니, 위험을 감수하고 새로운 방향을 뚫어보자 싶었죠. 저 역시 해보지 않은 일을 하면서 깨지기도 하겠지만, 깨지면서 성장할 거라고 믿습니다. 저는 아직도 깨질 게 많습니다.”
많은 이들이 ‘적게 일하고 많이 놀기를’ 바란다. 노동시간을 줄이고, 대신 여행, 등산, 취미생활을 늘리면 자신의 삶이 윤택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박승숙은 ‘나만 재미있는 일로는 의미가 없더라’고 말한다. 그것을 부채감이라 부르든, 열정이라 부르든, 그의 경험은 재미있는 일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무언가, 서로에게 연결되고 세상과 소통하며 기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우리 내면에 존재함을 알려준다.
박승숙은 예술과 관계, 집단지성 속에서 ‘다시’ 배우고자 하는 중년들과 함께, 배움의 여행을 떠나려 준비하고 있다. 자신의 경험, 관심사, 재능, 나이의 교집합 속에서 더 중요한 일, 그래서 더 재미있는 일을 찾은 듯한 그의 얼굴에서 우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작성자: 이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