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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다시 뉴스

[꼭 뭐가 되어야 할까?] #1

주중에는 글을 쓰고, 주말에는 커피를 내립니다.

by 다시

우연히(세상에 그런 우연이 어디 있겠냐고 묻겠지만 정말 ‘우연히’!) 서울 근교의 한 북카페에서 일하기 시작한 건 지난 3월부터다. 비록 주말에만 일할 뿐이지만 명색이 바리스타 겸 매니저다. 어디까지나 그 일을 하기 위해 커피를 배웠기에 경력도 일천(日淺)한데, 취업과 동시에 일약 매니저가 되었다. 사실은 낙하산이다. 업주와의 개인적 친분으로 이루어진 채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딱히 다른 직원은 없으므로 누군가에게 갔어야 할 공정한 기회를 박탈한 것까지는 아니라며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중이다.


결과만 두고 보면 나이 오십에 딱 맞춰 진정한 인생 이모작을 시작한 것으로 생각되어 부러움을 사기 십상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자기 주도적 계획이 아닌 우연이 만든 기회였고, 그 우연의 심연에는 개인적 인연이 있었다. 내가 한 일이 있다면 우연히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냅다 잡은 것뿐이었다.


요컨대 선배 부부가 은퇴 준비를 위해 건물을 지었고, 부부는 그 건물에서 할 수 있는 이런저런 일을 생각하다가 한 귀퉁이엔 독립서점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점은 한때 나와 의기투합해 독립출판도 했던(달랑 책 한 권 내고 폐업했지만) 선배의 오랜 로망이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처럼 책이 안 팔리는 시대에 책만 가지고는 절대 호객(呼客)할 수 없으니 커피라도 같이 팔아보자고 한 것이 모든 우연의 시작이었다.


어쨌든 전문적으로 커피를 만들어 내는 사람을 지칭하는 ‘바리스타(Barista)’가 바(Bar)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라는 것도 바리스타로 일을 하기 시작한 다음에야 알게 된 생초보 얼치기 바리스타는, 8개월째 주중에는 이런저런 글을 쓰고, 주말에는 커피를 내리며 물론 잊을 만하면 한두 권씩 책도 팔면서 팔자에 없던 투 잡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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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는 하루 종일 가수 정밀아의 노래가 흐른다. 건물주이자 북카페 사장인 선배 부인의 취향이다. 차분한 음성에 소박한 가사와 멜로디가 건물과도 잘 어울리고, 건물주와도 퍽 닮았다.


북카페라는 공간의 특성에 맞게 그렇지 않아도 잔잔한 그녀의 노래를 더욱 잔잔하게 틀어 놓으니 손님이 뜸한 저녁 시간이 아니고는 노랫말이 좀처럼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던 그날도 해가 넘어간 저녁 시간이었고, 손님이 거의 없었던 터라 <서울역에서 출발>이라는 그녀의 노랫말이 내 귀에 정확히 꽂혔다.


엄마 나는 대학 가면 그림 그려서

멋진 화가가 될 줄 알았지


한가한 틈을 타 에스프레소 머신 주변을 정리하다 말고 나는 정말 오랜만에 혼자 크게 웃었다. 그래, 나도 대학 가면 글을 써서 훌륭한 작가가 될 줄 알았지! 생활 밀착형 노랫말이 있다더니, 이쯤 되면 인생 밀착형인 게 아닌가 싶었다.


허나 딴짓을 아주 열심히 하였더니만은

이젠 노래하며 잘 살아갑니다


정밀아의 노랫말은 이렇게 이어졌지만 겁이 많은 편이었던 나는 딴짓도 한번 제대로 못해봤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커피를 내리며 살아가고 있구나 싶었다.


평생 한 가지 일만 하면서 살 줄 알았다. 아니, 평생 그 한 가지 일이라도 제대로 해낸다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문학 전공자가 그러하듯 나 역시 어려서부터 읽고 쓰기를 좋아했던 터라 글로 세상을 배우고, 글로 세상과 소통했다. 그러다가 취미이자 특기였던 글쓰기가 직업이 된 한 마디로 ‘무재주’인 사람이다. 그 글이라도 아주 잘 썼더라면 이름이라도 났을 텐데, 그 역시 그만 그만한 수준에 머문 채로 어영부영 지금까지 왔다.

그래서 직업이 무엇인지 물으면, 나는 ‘작가’라는 명사 대신 ‘글을 씁니다’라는 동사로 대답하곤 했다. ‘작가’라고 하면 누구나 알 법한 대표작 하나쯤은 말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았고, 또 그걸 묻는 질문이 반드시 뒤따를 것이라 지레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얼마 전부터 문득 ‘왜 단지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나를, 혹은 내 직업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글을 씁니다’, ‘커피를 내립니다’, ‘그림을 그립니다’가 아니라 ‘작가입니다’, ‘바리스타입니다’ 혹은 ‘화가입니다’라고 말하기를 강요하는 것은 정말 사회통념일까, 아니면 나 자신일까 하는 생각도 꼬리를 물고 일었다.


우리는, 아니 나는 늘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이름이 나지 않았으니 어디 나서서 작가라고 말하기도 부끄럽고, 바리스타 자격증이 없으니 아직 정식 바리스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가라 할 만한 대표작이나 바리스타의 내공을 증명할 자격증을 요구한 것은 정작 나 자신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주중엔 글을 쓰고, 주말엔 커피를 내리며 나름대로 잘 살고 있는 나를 그냥 이대로 말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아무것도 되지 않았지만 지금 이대로도 썩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는 요즘이다.


정연숙 작가.PNG 다시뉴스 필진 정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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