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를 이야기하는 이유
“공동체… 좋기도 하고 힘들기도 한 애증의 대상이죠.”
공동체를 주제로 글을 써보겠다고 하자 인터넷신문 <다시> 편집인이 보인 반응이다. 편집인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주제를 듣는 순간 복잡한 심경이 된다는 것을 안다. 공동체는 그런 데고, 그런 존재다. 당신도 아마 공동체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무너진 순간이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사람이 모인다고 반드시 공동체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모이지 않은 공동체를 상상하기 어려운 까닭에, 사람과 공동체를 따로 떼어서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공동체에 대한 실망은 공동체가 지향하는 가치에 대한 실망이기보다는, 공동체에서 함께하는 사람에 대한 실망일 때가 많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많은 공포증이 존재하듯, 나도 여러 공포증을 가지고 있다. 고소공포증, 폐소 공포증, 공포증이라고 부르기는 좀 그렇지만 ‘백화점에서 30분 버티기’도 있다. 아니, 30분이 채 되기도 전에 체력과 인내심이 바닥난다. 이유를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닌데, 정보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을 위한 공간이기에 신경 써야 할 것, 신경 쓰이는 것들이 많고, 밀도가 높은 많은 정보를 적절히 조절해야 하기에, 기력이 쇠하고 예민해진다.
여기서 벗어나는 방법은, 조용한 장소에 가서 홀로 있는 것이다. 그럼 곧 평소의 나로 돌아온다. 점잖고, 부드럽고, 상냥하며, 여유 있는…. 근데 문제가 있다. 홀로 있으면 늘 괜찮은가? 아니다. 여러 날 지방 출장을 가거나 집이 비어서 혼자 지내게 되면, 대책 없이 외롭다. 학창 시절 나는 늘 외로웠다. 장사를 하시는 부모님은 밤 10시가 넘어야 들어오셨고, 저녁 시간은 늘 혼자 보냈다. 그리고 나는 외아들. ‘외로움은 적응되지 않는구나’ 중학교 때 이걸 알아버렸다. 대책 없는 외로움에 사로잡힐 때 벗어나는 길은, 나가서 사람들 사이에 머무는 것이다. 꼭 누구와 만나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버지니아 울프가 밤의 런던 걷기를 즐겼던 것처럼,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만으로도 외로움이 조금은 사라진다.
지금은 자신이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적절한 거리와 적당한 빈도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는 생각과 그 아이디어를 경영할 경험의 양과 질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오랜 시간 해법의 부재로, 또 수많은 시행착오로, 가볍지 않은 학창 시절과 이삼십 대를 보냈다. 배가 고플 때 장을 보면 필요 이상으로 구매하는 것처럼, 마치 시소와 같이 이쪽과 저쪽을 번차례로 치기를 반복했다. 맹목적으로 사람을 갈망하고, 눈을 부릅뜨고 사람을 기피했다. 이 둘이 결국 결핍의 서로 다른 존재 방식일 것이다.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외롭고, 외롭기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부족하다’와 ‘넘친다’가 관계의 무게와 이중성을 잘 보여주는 말 같다. 그처럼 적당히 하기가 쉽지 않은 무엇이 관계라면, 그 특성이 고스란히 담긴 것이 공동체다.
비약이긴 하지만 이런 경험과 고민 끝에 결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공동체다. “왜요?” 간혹 질문을 받을 때,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고 대답하는 것으로는 어쩐지 개운치 않았다. “저는 친구가 필요 없어요.” 성실한 논리와 진지한 태도로 말하는 학생을 가끔 만날 때가 있는데, ‘그러니까 인간은…’ 이런 말로는 학생뿐만 아니라 나를 설득하기에도 뭔가 부족하다고 오래 느껴왔다. 친구가 필요 없다는 학생을 설득하는 것이 내 목적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를 선택하는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고, 곧 저 학생과 같은 또래가 될 네 아들과 이 주제로 이야기하려면 나도 뭔가 준비해야겠구나 정도의 필요를 느낀다.
오래된 이야기를 나누고 글을 마무리하겠다. 나귀를 장에 팔러 가는 부자(父子) 이야기다. 부자는 나귀를 타지 않고 끌고 간다. 사람들이 수군댄다. “아니, 왜 멀쩡한 나귀를 놔두고 걸어가.” 아버지가 아들을 태운다. 사람들이 수군댄다. “고얀 놈.” 아버지는 얼른 아들을 내리고, 자신이 나귀에 올라탄다. 사람들이 수군댄다. “모진 아비.” 아버지는 아들도 함께 태운다. 사람들이 수군댄다. “가엾은 나귀.” 이도 저도 다 해 본 부자는 도무지 어쩔 줄을 몰라하고, 이를 본 한 사람이 나귀를 들쳐 엎고 가라고 충고한다. 부자는 나귀를 번쩍 들어 올린다. 이 위태로운 여정은 개울을 건너는 중에 파국을 맞이한다. 어깨에 올라타 있는 나귀는 출렁대는 물을 보고 무서워 몸부림친다. 물에 빠지는 나귀.
이 이야기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귀가 너무 얇으면 안 된다? 원래 이야기의 주제는 아무래도 좋다. 그것과 상관없이, 나는 이 이야기가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의 딜레마로 읽힌다. 세계를 둘러보면 포스트모더니스트라 불리는 프랑스 철학자/작가들의 말마따나 이제는 거대 서사가 사라지고 혹은 사라져야 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단 하나의 기준이나 정답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알겠는데…, 그럼 나귀를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지?!
자본주의는 어떤 게 더 돈이 되는지 따질 것이고, 윤리의 관점에서는 어떤 것이 더 바람직한지 물을 것이며, 인권이나 동물권의 감수성으로 저마다 보는 것이 또 다를 것이다. 잠깐만 생각해도 누구의 어떤 가치관을 중심으로 판단해야 할지 막막하다. 모든 것이 가능한 사회는 다양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준이 없는 사회일 수 있다. 어떤 문제에 사회적 합의를 시도하고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은 실용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다양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도 의미 있는 시도가 될 수 있다.
혹시 나와 같이 당신도 공동체의 중요성에 동의하고, 공동체에 관한 부정적인 경험이 있음에도 공동체를 쉬이 제쳐두지 못하는 쪽이라면, 공동체라는 오래된 이야기를 해 보기로 하자. 아니면 도대체 나귀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