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씨 이야기 2 - 마지막 회
특성화 고등학교를 한 학기도 못 채우고 자퇴한 지은 씨는 검정고시란 말만 나오면 입을 꾹 닫습니다. 그런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는 듯 딴청을 하거나 아예 모르쇠로 일관하는 전략을 지난 이삼 년간 쭉 유지해 왔고, 어느 정도는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곧 스무 살이 되는 지은 씨는 무엇보다도 ‘학력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당장 오늘을 살기 위해서라도 어딘가에 소속이 되어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인증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생계지원금이 지급되기 때문입니다.
작은 체구에, 잦은 흡연에, 게다가 억울한 일은 절대 못 견디는 지은 씨 성격상 사나흘 이상 계속할 수 있는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무척 난망한 일입니다.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가는 일이 쉽지 않으니, 공부를 아르바이트 삼아보자는 황당한 언설로 꼬드긴 지 석 달 만에야 지은 씨는 학교 복적 서류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하지만 스무 살을 코앞에 두고 고등학교 일 학년이 될 생각에 자주 절망스러워했습니다. 열아홉 살에 일 학년으로 복적해 올해 졸업을 앞두고 있던 선영 씨를 언급하면서 ‘너도 하면 된다’, ‘교육부 시계도 거꾸로 매달아 놓아도 흘러간다’ 따위의 말로 구슬리다가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검정고시 시험공부 할래? 그냥 학교 출석만 할래?’ 하며 협박(?)한 끝에 확정된 복학 결정이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지은 씨의 학업 의지를 재확인하고 싶었는지 다음과 같은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감사 일기 쓰기, 일천 미터 급 산 등반 인증, 그리고 예비 수업 3일 참석. 산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고, 죽어도 못 오른다는 지은 씨를 위해 그룹 팸 생활을 같이한 은수 씨와 선우 씨 커플이 동행을 자처했습니다. 둘이 지은 씨를 업고 끌고 매다시피 해서 오른 산에서 드디어 정상 등반 인증 사진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 일기에 대해서는 ‘이 인생을 살아오면서 감사할 사람이 있었겠냐’, ‘감사 대상 찾다가 더 열불 난다’며 극구 거부했지만 ‘그럼 나한테도 감사한 마음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냐’는 활동가의 말 한마디에 며칠 치 감사 일기를 한 번에 써 내려간 지은 씨입니다.
그렇게 ‘복적의 꿈’이 무르익어 가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예비 수업을 딱 하루 다녀온 지은 씨가 다시 묵언과 등교 거부에 돌입하면서 결국 공교육 복귀 프로젝트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생계지원금을 받기 위해서 학적을 두고 공부할 곳이 꼭 필요했던 지은 씨는 학교의 배려로 지역 내 학력 인정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때맞춰 창궐한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일주일에 두 번 진행되는 등교 수업일도 지키지 못해 결국 한 달 만에 또 자퇴하게 되었습니다. 반복되는 실패에 민망했는지 지은 씨는 이번에는 정말 잘 다녀보고 싶었다고, 선생님들도 다들 친절하게 대해 주어서 마음에 들었다고, 그런데 학교 가는 날짜를 자꾸 까먹고, 늦잠을 자는 통에 지각하고 그러다 보니 미안해서 학교를 더 못 나갔다고,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열심히 했습니다.
‘처음으로 다니고 싶은 학교’였다는 말에 희망을 걸고 마지막 남은 선택지로 향했습니다. 지역마다 설치된 학교 밖 청소년 지원시설에서 운영하는 검정고시 과정이었습니다. 믿고 의지하던 은수 씨도 함께하고, 은근히 지은 씨에게 관심을 보이던 상철 씨도 공부를 같이 하기로 해서 잘하면 한꺼번에 셋 다 고졸 학력 인정을 받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도 일어났습니다. 활동가의 기대에 부응하면서 그렇게 두 달 넘게 잘 다니던 지은 씨는 여름이 시작되자 더 이상 공부하러 가지 않겠노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번에는 은수 씨까지 한마음이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정말 못하겠어요. 차라리 알바할래요.”
“졸업장이 있어야 알바도 할 수 있어. 중졸이라고 해봐, 편의점에서도 잘 안 써줄걸? 계산이나 제대로 할까 하고 말이야. 검정고시는 학교 다니지 못한 청소년들을 위해서......”
“알아요. 우리도 마지막이란 거!”
“그러니까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가보면......”
“우린 안 돼요. 이번에 검정고시 예비시험 봤는데, 점수가 나왔단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 셋이 차례대로 꼴등이에요. 일부러 검정고시 보려고 자퇴한 애도 있고, 또 다 집에서 다니는 애들인데, 우리는 그 애들하고는 다르잖아요. 우리가 꼴등으로 쫙 깔아주는 거 학교 다닐 때도 창피하고 지겨웠는데, 검정고시 하러 와서도 우리가 바닥 깔아줘야 하는 게 정말 싫어요. 우린 어차피 시험 봐도 안 될 거예요. 그만 다닐 거예요.”
그동안 이들이 얼마나 힘들어하면서 다녔을지 짐작이 되었습니다. 지원금을 명목으로 억지로 교실에 몰아넣은 것 같아 자책이 들기도 했습니다. 검정고시마저도 성적 순서로 줄 세워진 경험은 이들의 가뜩이나 낮은 자존감에 무거운 돌을 더 얹은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나마 교육의 기회가 있어 평등한 삶의 기회가 주어진다고는 하지만 학력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가장 밑바닥 교육 기회마저도 가정의 보살핌 없이 혼자서 밥 해 먹고 수업 찾아다녀야 하는 이들에게는 처음부터 동등하지 않은 경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거기에 더해 십 년 이상 된 혼자살이의 고단함은 공부 의지와 공부 머리에도 이미 너무 많은 상처를 낸 상태입니다.
당분간 고졸 학력 인증은 포기하고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검정고시는 나중에 스스로 준비할 수 있을 때가 되면 그때 다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3년이 흘렀지만, 이들은 여전히 중졸입니다.
지은 씨는 스무 살이 넘으면서 자신의 이름으로 된 ‘씨앗통장’의 예금을 꺼내 쓸 수 있다는 걸 알고 독립을 모색했습니다. ‘씨앗통장’은 보호시설에서 퇴소하는 보호 종료 청소년을 지원하는 ‘사회 정착금’이 예치된 통장으로 보호자나 시설 동의 없이도 사용할 수 있는, 이들 생애 처음 쥐어보는 거금입니다. 겨우 천만 원 남짓이지만 만 원 한 장이 없어서 굶기와 노숙을 반복해야 했던 이들에게는 엄청나게 큰돈입니다.
이들은 이 돈으로 생애 처음 자기만의 방을 마련하고, 아르바이트로 일을 하면서 좀 더 안정적일 독립의 삶을 꿈꿉니다. 하지만 지금 세상에 천만 원으로 독립에 성공하기란 난망한 일입니다. 더구나 사회적 자원이라고는 숟가락 한 개만큼도 없는 이들에게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꿈입니다. 평균 네다섯 달도 안 되어서 정착금을 소진하고 나면 삶은 다시 절망입니다. 그다음 선택지는 스스로 덫으로 기어들어 가는 삶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은 씨는 방을 구하자마자 반려견 한 마리를 데리고 왔습니다. 독립생활을 잘하려면 돈 쓰는 일을 잘 배워야 한다고 말한 다음 날 벌어진 일입니다. 한 달 사료 값만도 십만 원 이상이 들고, 아프기라도 하면 병원비도 적은 돈이 아닌데, 수익도 없이 통장 돈 빼서 살아야 하는 상황에서 개부터 데려오면 어떡하냐는 말이 서운했는지 다시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유기견이거나 지인에게서 입양한 것이냐고 물으니, 애견 숍에서 데려왔다고 하면서도 얼마에 샀는지는 끝내 말하지 않았습니다.
“유기견 분양하는 데도 있을 텐데...”
“걔네들은 내 생각이 나서 싫었어요.”
“..... 몇십만 원은 들었을 텐데, 돈 그렇게 쓰기 시작하면 정말 금방...”
“알아요. 이제부터 알바할 거예요.”
“알바부터 구하고 나서 데려왔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저도 가족이 필요해요. 혼자 살게 되면 정말 가족처럼 강아지를 기르고 싶었어요. 내가 잘 돌볼 거예요.”
가족이 필요했다는 말에 아무런 대꾸도, 훈계도 할 수 없었습니다.
혼자 제 몸 돌보는 일도 익숙하지 않은 지은 씨지만 가족으로 생각하는 누군가를 돌보는 경험도 소중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입니다. 지은 씨의 표정이 밝은 날이 더 많아진 것입니다.
스무 살이 막 넘은 은수 씨는 임신 소식을 알려 왔습니다. 한 살 위인 선우 씨와 함께 지내고 있던 터라 ‘이야기’를 많이 해 두었는데도 찾아온 소식입니다. 은수 씨는 잘 키우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남편 자리는 무직에 곧 군대도 가야 했고, 아기 엄마 건강도 좋지 않은 상태라서 걱정이 앞서지만 은수 씨의 결심은 단호했습니다.
“혼자서라도 잘 키울 수 있어요.”
활동가들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은수 씨는 ‘하루라도 빨리 내 가족을 갖고 싶다’고 간절하게 이야기합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초등학교 때부터 시설 살이를 해야 했던 은수 씨였기에 외로움을 해결할 길은 가족뿐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혼인신고도 안 되어있고, 혼자 아이를 키우는 일이 정말 힘들어질 수도 있는데...”
“혼자 기르는 일이 어려워지면 그땐 시설로 보낼게요. 저도 시설에서 살았잖아요. 제가 돈 벌면 그때 다시 데려오면 되잖아요.”
은수 씨는 몇 달 뒤 여름에 건강한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이 돌잔치를 앞두고 시부모의 승인으로 혼인신고를 하고 남편 선우 씨와 함께 아이를 잘 기르고 있습니다.
가족의 온기를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온 이들이 ‘가족’을 이야기를 하면 활동가들은 속수무책으로 무장해제가 되어버립니다. 이들의 신산한 삶이 결국 가정의 소멸에서 시작된 것이기에 어떤 형태로든 가정을 갖는 일이 가장 소중한 기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가정이라는 둥지를 짓지 못하거나, 기왕에 만들어진 둥지도 이런저런 시련에 훼손되는 일이 많아진 지금 세태에 역설적으로 이 청춘들은 더욱 맹렬히 가정을 소원합니다. 그렇게 힘겹게 만들어진 가정을 잘 지켜나갈 수 있도록 이웃 사람으로 마음을 보태는 일이 ‘비지트’의 새로운 일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마지막 원고 마감을 하려는데 인문계 학교 가기 싫어서 가출을 감행했다가 학력 인정 학교로 전학을 가서 지금은 사회복지학과 대학생이 된 아은 씨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쌤! 인문계고 일 학년인데요, 제가 다녔던 학교요. 가정폭력으로 집을 나왔어요. 학교는 다닐 거라는데, 일단 집을 좀 피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한 이틀은 아는 언니 집에서 있을 건데, 그 뒤에 있을 쉼터 같은 곳이 없을까요?”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렇게 또 한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칠팔 년 전에 길 위에서 만난 인연들의 시간을 되감으며 그이들의 이야기를 짓는 일이 버거웠습니다만 그 인연들로 인해 그나마 저의 날들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함께 봉사했던 청년 봉사자들, 밥으로 재능으로 시간으로 보태준 지역 사회의 인연들, 여전히 병원비와 검사비와 생활비를 돕는 멀리 계신 인연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짜 사회복지 일을 찾았다는 동료 활동가 ‘이 국장님’ 덕분에 당분간은 더 이 고단한 어린 청춘들을 위한 의자로 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읽어주고 마음 보태주신 모든 분께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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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라다키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