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jung KIM Mar 14. 2018

넘어지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밤의점장이 들려주는 인생의 낙법


 고양이 보니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때 안정적으로 착지한다. 중후한 몸무게를 찍은 이후에도 흔들림 없이 점프하고 착지하는 보니를 보면 자연스레 감탄이 나온다. ‘나도 저렇게 우아하게 착지하고 싶어.’
 우리의 현실은 고양이의 착지와는 다르다. 매번 흉하게 넘어지고 그렇게 아플 수가 없다. 그래도 나이가 들어가며 좋은 점은 넘어진 자신의 모습을 연민하는 시간은 줄고, 덜 아프게 넘어지는 법을 배워간다는 거다. 예전엔 넘어지지 않으려고 바짝 긴장한 채 버텼다면 이제는 그냥 넘어지고, 징징거리고, 다시 일어난다. ‘모두 자기 인생 사느라 바빠서 타인에게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다. 그러니 나 좋을 대로, 편하게 행동하자.’ 이렇게 마음먹고 나니 넘어진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한결 너그러워졌다.   
 유도 선수들은 자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제대로 넘어지는 기술을 배운다. 이를 유도 용어로 ‘낙법’이라고 한다. 최근 나는 어떤 일이 닥쳐도 꿋꿋하게 넘어지지 않는 법이 아니라, 잘 넘어지는 법, 넘어졌다가도 편안하게 다시 일어나는 이 ‘낙법’에 관심이 생겼다. 앞으로의 인생을 잘 꾸려가려면 나만의 낙법을 터득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마법 같은 기술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내가 넘어지며 겪은 시행착오를 더듬어가며 아직까지 무사한(?) 스스로를 격려하고, 제대로 넘어지는 법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더불어 책 속에 자신만의 비기를 숨겨둔 작가들, 그리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선후배나 서점 손님들의 태도로부터 배운 낙법도 함께 소개해보려고 한다.
 
 <비폭력 대화>의 작가 마셜 로젠버그는 “‘해야만 한다(should)’라는 단어를 포함하는 모든 생각은 폭력을 자극한다”라고 말했다. 그 폭력은 많은 경우 스스로를 옥죄는 족쇄로 작용하고, 때로는 자신과 다른 기준으로 살아가는 타인에 대한 거친 표현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장남이라면... 서른이 되었다면... 어머니라면 모름지기... 반드시 ~해야만 한다’라는 명제가 현대인의 강박관념으로 작용하는 것을 가리켜 카렌 호나이는 ‘슈드비(should be) 콤플렉스’라고 명명했다.
 10년간의 회사 생활은 나에게 다양한 성장의 기회를 주었음에도 나는 이 ‘슈드비 콤플렉스’에 적지 않게 시달렸던 것 같다. 수많은 활자중독자 편집자 선후배 사이에서 내가 읽지 않은 책, 모르는 책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며 더 완벽하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이상적인 편집자 모델에 내가 부합되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괴로웠고, 그런 스스로를 가혹하게 몰아붙였다. 더 많이 알아야 하고, 더 잘해야 하고, 더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 이런 성향의 사람은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 집중하고 책임감 있게 업무를 처리하는 반면 자기 자신은 고려대상에서 늘 소외된다.


 그러한 ‘해야 한다’의 강박에서 나를 자유롭게 한 첫 경험은 퇴사 후 일산의 어느 소설교실에서 단편소설을 쓴 일이었다. 공모전에 낸다거나 소설가가 되겠다는 목적 없이 그냥 ‘한번 써볼까’로 시작한 그 일은 굉장한 해방감을 안겨주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첫 이야기에서 다룬 ‘어머니 이야기’는 뿌리 깊은 나의 문제를 치유해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서점을 운영하는 지금, 책을 완벽하게 알아야 한다는 강박에서는 자유로워졌다. 좋아하는 책을 읽고 손님들과 책 이야기를 하고 꽤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슈드비 콤플렉스’를 완전히 극복했는가?
 아니다. 아직도 잊을 만하면 넘어진다.

 최근에 어느 친구의 말을 듣고 꽤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다. 그리고 내가 또 다른 친구의 기분을 상하게 한 일도 있었다. 전자는 상대가 나의 약한 부분을 지적한 경우였고, 후자는 내가 어느 새 ‘~해야 해’라는 내 기준을 친구에게 적용해서 그의 기분을 상하게 만든 일이었다. 그 일들을 겪으며 나도 모르는 사이 ‘이상적인’ 서점주인 이미지(그런 게 있다면!)에 갇혀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이미지에 맞지 않는 상대의 평가에 퍽 의기소침해졌고, 그랬으면서도 다른 친구를 만나서는 무심하게 내 기준으로 상대를 단정지어버렸다.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마다 프린츠 필스의 ‘게슈탈트 기도문’을 떠올린다. ‘~해야 한다’라는 명제가 나를 괴롭힐 때마다 우리의 다름과 적절한 거리를 생각하며 조금 가볍게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난다. 여러분에게도 도움이 되기를.

 나는 나, 당신은 당신
 나는 나의 일을 하고,
 당신은 당신의 일을 합니다
 나는 당신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도 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당신, 나는 나
 만약 우연히 우리가 서로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