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연민의 자리에서 일어나기
지난 주 모임에서 선배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50대에 접어들면서 쇠잔해가는 육체를 느끼고 있다. 남겨질 아이들에 대한 걱정, 미래에 대한 불안 등등이 겹쳐서 겨울이 길고도 우울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아내가 안경을 벗고 눈을 비비는 걸 보았다. 아내의 눈가가 그렇게나 푹 꺼져 있다는 걸 처음 발견했다. 주름은 익히 보았지만 아내의 안경 너머를 자세히 본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함께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동지, 강인하게만 보였던 그 사람도 나와 마찬가지로 세월을 온몸으로 겪고 있구나... 혹시라도 아내가 먼저 떠난다면 나는 견딜 수 있을까? 우리 아이들은? 우리가 함께할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 걸까? 이 시간을 흘려보내지 말고 무언가를 해야겠구나!
아내의 안경 너머를 바라보며 그의 머릿속을 스쳐갔던 질문들이 내게는 소설의 어느 장면보다 아름다웠다. 나이 들어가는 일의 고단함을 지켜봐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 그것이 결혼이라면 사람들이 말하는 희생도 해볼 만하겠구나, 그런 생각도 했다. 자기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대신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느끼기 시작할 때 비로소 무언가가 시작되는 건지도 모른다.
오랜 친구와 결별하던 어느 저녁이 떠올랐다. 십대에 만나 15년 가까이 알고 지냈던 우리를 갈라놓은 건 “우리 사귈까”와 어긋난 타이밍 때문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어 거의 잠을 자지 못한 그가 나를 만나러 왔을 때 나는 지독한 자기연민에 빠져 있었다. ‘인지삼제(cognitive triad)’의 패턴(자신과 세상, 미래에 대해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독특한 사고방식) 그대로 움직였던 것 같다. 실제로 힘든 가정사가 3년째 내 발목을 잡고 있었고, 내가 느낀 무력감과 슬픔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처럼 자기연민의 늪에 빠져 있는 이에겐 타인이 보이지 않는다. 내 앞에 마주하고 있는 사람이 어떤 시간을 살아내고 있는지 생각할 여유도 없고, 나와 같은 무게는 아니더라도 그 역시 힘든 시간을 거치고 있을 거라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나는 그와 함께 있는 시간 내내 ‘내가 지금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 토로했다. 어린 나는 위로를 받고 싶었으리라. 그에게도 마찬가지의 사정이 있을 거라는 사실은 안중에 없었다. 어떤 일을 계기로 이제 보지 말자고 한 쪽은 나였지만, 그가 지쳐 도망갔으리라는 걸 이제 알겠다.(너의 고단함을 알아봐주는 사람을 만나 지금은 잘 지내고 있기를.)
13세기 일본의 도원 선사는 “우리는 자신을 잊었을 때 만 가지 일을 기억한다”고 했다. 자신을 잊기, 자기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기. 여러 번 넘어지다 보니 내 곁에 있는 이의 고단함을 보지 못하게 막는 것이 자기연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물론 아직도 거기서 자유롭지는 않다. 그래도 선배의 말에서 힌트를 얻었다. 친구든 연인이든 배우자든 나란히 앉아 가만히 손을 잡은 채 그를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그의 얼굴과 눈에 담긴 고단함을 볼 수 있을 때 나의 고단함을 떨치고 일어날 힘이 생길지도 모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