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jung KIM May 14. 2018

‘두 죄르 에 드미’의 오해

잘 거절하는 연습

 청춘영화에는 친구 무리의 눈치를 보느라 주인공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캐릭터가 종종 나온다. 며칠 전 불어 문장을 읽다가 “deux heures et demie(2시 반. ‘두 죄르 에 드미’로 발음)”가 나왔는데 마들렌 향을 따라 과거를 거슬러 올라간 프루스트처럼 어떤 기억이 눈앞에 소환되었다.


 정류장 근처를 오가며 몇 번 마주친 사람이었다. 프랑스인들은 길을 걷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짓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우연이 반복되자 우리는 가벼운 인사를 나누었다.
 “옹 스 부와 아 두죄르 에 드미?(12시 30분에 볼까요?)”
 어느 주말, 그가 나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면서 기숙사로 데리러 온다고 했을 때 친한 지인들은 그 의도를 놓고 설왕설래했다. 그리고 위험한 의도를 품은 프랑스 남자로부터 나를 보호해준다며 당일 12시 정각이 되자 까르푸에 장을 보러 가자고 했다.
 “약속 있는데요?”
 “혹시 그놈이 뭐라고 하면 2시 반인 줄 알았다고 해.”

 두 죄르 에 드미. 불어로 ‘douze heures et demie(12시 반)’와 ‘deux heures et demie(2시 반)’는 발음이 비슷하다. 그래서 낮 12시 반은 ‘midi et demi(미디 에 드미)’로, 오후 2시 반은 ‘quartorze heures et demie(14시 30분)’로 좀 더 분명히 말하기도 한다. 그날 그는 ‘두 죄르 에 드미?’라고 물었고, 나는 12시 반에 로비에서 보자는 말로 알아듣고 헤어졌었다.
 나중에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은 나를 만나러 그가 찾아왔을 때 나는 어색한 얼굴로 “2시 반이 아니었어요?”라고 말했다. 2시 반에도 그 자리에 없었던 내가 할 말은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 상처받은 표정이 스쳤다.
 나는 부끄러운 감정을 느꼈는데, 그의 제안을 확실한 태도로 거절하지도 않고 다른 이들 뒤에 숨어서 그의 마음이 진짜였는지 시험해보려 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당시 친하게 지내던 한국인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눈치를 봤던 것 같기도 하다.(지금은 정말 의미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며칠 전 어느 바의 열린 창 앞에 앉아 친구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나가던 취객 남자들이 이쪽을 보고 순간적으로 문을 열고 들어오려고 했다. 그때 나와 대화를 나누던 친구가 고개를 돌려 단호한 태도로 “너한테 관심 없으니 그냥 가!”라고 말했다. 그들은 주춤거리며 꽁무니를 뺐다.
 목소리도 높이지 않고 단호하게 끊어낸 그녀가 얼마나 멋있던지! 꼭 사람만이 아니라 나와 맞지 않는 제안, 나를 불편하게 하는 시간을 견디지 않고 적절히 거절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요즘의 화두다.

 얼마 전 서점 손님이 회사 내 뒷담화에 끼어야 하는 일이 곤혹스럽다며 내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 역시 그런 자리에서 강하게 반발하며 일어나는 타입이 아니므로 별 조언도 하지 못하고 유투브 영상(김호 대표의 ‘나의 거절이 안전에 중요한 이유’. 좋은 영상이니 한번 찾아보세요)을 참고하라고 보내주기만 했다.
 거절하지 못하는 심리 이면에는 그 문제를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나를 억지로 보호하려 했던 지인들의 눈치를 보며 까르푸에 따라갈 게 아니라, ‘이건 내 문제니 내가 알아서 할게요’라고 분명히 뜻을 밝히고 그들의 참견을 거절했어야 했다.(혹은 제안을 한 당사자에게 내 의사를 분명히 밝히든가.)
 원치 않게 우리의 시간과 감정을 소모하는 뒷담화에 대해서도, 지금의 나라면 단호하게 그 자리를 빠져나오라고 말해주고 싶다. 사실 나 역시 직장에 다니던 시기에 유체이탈 하는 심정으로 그런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적이 많았다. 감정적으로 영향을 안 받는 사람도 아니라 그런 모임이 파하고 나면 부정적 에너지가 한바탕 나를 쓸고 지나가 폐허가 된 느낌이었다.(회사 내의 공공의 적에 대해 나 역시 같은 마음이라면 다른 이야기다.) 가끔은 화살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깔아뭉개야 자신의 존재이유가 증명되는 미묘한 관계들도 있었고, 그들 대부분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다.
 취객을 향해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밝힌 그녀가 멋있었던 이유는 평소 거절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어서다. 나도 연습에 들어가기로 했다. 늘 친절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낮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거절하는 연습을.  

*이 글은 엔니오 모리꼬네의 <the crisis>를 들으며 썼어요.
“이 곡은 희한하게 불협화음이 계속 연주돼요. 그게 삶 같아서 위로가 돼요. 인생의 낙법이라니 이 곡이 생각나서.”라는 메시지로 영감을 준 P 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냅니다.

작가의 이전글 실패의 역사에 대처하는 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