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pired by 피천득의 ‘나의 사랑하는 생활’
선배가 말했다. 즐거움의 감각에 대해서도 좀 써줘. 아프지 않게 넘어지는 것만으로는 아무래도 방어적이 되지 않겠어. 우리에겐 일상의 즐거움이 더 필요하오.
그러던 차에 피천득의 에세이 ‘나의 사랑하는 생활’을 다시 읽었다. 읽자마자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기분이 되어서, 서점 문을 닫고 낭독을 했다. 지금 내 손에 잡힐 듯 만져지는 기쁨의 감각에 대해 나도 같은 제목으로 글을 쓰고 싶어졌다.
여름 아침, 파자마 차림으로 싱크대 앞에 서서 복숭아를 한 입 베어무는 순간을 좋아한다. 손가락 사이로 과즙이 줄줄 흘러내리고, 하루를 시작할 기운이 복숭아를 타고 내 안으로 흘러들어온다.
거울 앞에서 외출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고양이 보니가 캣타워에 앉아 나를 바라보는 표정을 사랑한다. ‘어이, 이제 가려고? 오늘은 좀 늦네?’ 이렇게 말을 걸고 곧 오수를 즐길 채비에 들어가는 내 고양이, 저녁이 내리면 정확히 자신을 보러 올 거라는 걸 확신하는 심드렁한 표정을 좋아한다.
작업을 하러 매일 가는 카페에 들어설 때 아르바이트생 언니가 너무 과하지 않게 나를 알아보는 웃음을 지을 때가 좋다. 늘 앉는 자리에 노트북을 펼치고 전원이 들어올 때까지 작은 노트에 이것저것 메모한다. 오늘의 작업량이라든지 주문 넣을 책 리스트나 잊으면 안 되는 약속들. 늘 마시는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도착하면 노트북의 흰 화면도 펼쳐져 있다. 고심하며 고르지만 번번이 마음에 차지 않는 문장들. 원어의 아름다움을 옮겨내지 못하는 자신을 자학하며 부담을 느끼는 순간도 아직은 괜찮다. 잘해내고 싶은 거니까. 어떻게든 하루의 작업량을 끝내고,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의 신기한 드립에 혼자 깔깔대는 순간을 좋아한다.
동네를 산책하는 동안 고요한 공기가 내 안을 채우는 순간이 좋다. 동네 할머니들의 사랑방인 듯한 오래된 미장원(문을 열고 들어서자 할머니들이 함께 모여 밥을 먹다가 나를 쳐다보신 기억이 있다)과, 갤러리와 미용실을 함께 하는 내 취향의 미장원이 함께 있는 연희동을 좋아한다. 모자가게와 이불집과 세탁소와 공방 주인들의 말간 얼굴이 좋다. 하나같이 자기 일에 집중하는 그 단순한 표정을 보면 전전긍긍하던 마음 따위는 멀리 사라진다. 사실 우리 삶은 늘 스트레스를 주는 소식들 투성이니까. 요리조리 잘 피해 다녀야 한다.
뜨거운 햇살에 반쯤 구워져서 밤의서점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이 좋다. 서늘한 동굴로 들어서면 여기저기 거미줄과 곱등이 등도 나를 같이 반겨주긴 하지만. 너희도 다 먹고살자고 그러고 있는데 미안하다, 손님이 오시기 전에 사라져줘야겠어, 하며 무심하게 벌레를 제거하고 청소기를 돌린다. 드문드문 손님들이 오가고, 퇴근 즈음이 되면 동네 손님들이 환한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을 좋아한다. “저번에 추천해주신 책, 좋았어요.” 수줍은 얼굴의 손님이 이렇게 말해주는 순간도 좋다.
약속에 늦은 친구가 달려와서는 “미안, 오래 기다렸지” 하며 숨을 고를 때 그의 인중에 맺힌 땀방울이 사랑스럽다. 여름밤, 오래오래 걷는 것도 좋다. 운동화든 플랫슈즈든 힐이든 상관없이 여름밤은 걸으라고 있는 거니까. 밤산책을 할 때 팔에 살짝 돋는 소름도 좋고, 보폭을 맞춰 걷는 세심함도 좋다. 가끔 그때 나눈 대화나 농담들은 종종 생각날 정도로 좋다.
새벽 3시 40분 즈음 읽는 책은 각별하다. 아무도 나를 위로하지 못할 때 가만히 내 망막에 내려앉는 활자들은 기가 막히게 내 마음을 잘 알아주니까. 무척이나 애정을 주었으나 다른 사람에게 가버린 사람을 오랜만에 만났는데, 밉기는커녕 여전히 너무 괜찮을 때 느끼는 나의 심정을 기술하시오. 새벽에 고른 책들은 나를 가장 잘 아는 전남친처럼 내 탐닉의 밤을 함께 건너간다.
마지막으로 욕심 따위는 부릴 줄 모르던 내가 갖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아진 지금이 좋다. 어서 일기장을 펼쳐 마감 후 하고 싶은 일 리스트를 적어보리라. 독일에 가 있는 친구가 보고 싶어 밤마다 비행기표를 검색중인데 언젠간 가게 되겠지.
*여러분도 한 페이지만 써보시길. 사실 떠오르는 건 아주 특별한 순간들이 아니다. 극히 평범한 기쁨의 순간들을 하나하나 적어가다 보면 든든한 낙하산을 메고 일상을 비행하는 기분이 들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