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애기지만 인정하고 싶진 않아.(feat. 나도 사랑받고 싶어.)
내가 처음 유치원 교육실습을 갔었을 때, 7세 반 배정을 받았었다. 사실 7세는 유치원에서 최고 형님이라 어느 정도 어른(?) 대접을 받는다. 10월 실습이어서 2학기에 본 유아들은, 사실 몇 달 후면 바로 옆 건물로 이동해 다니면 되는, 유아라고 할 수 없는 예비초등학생들이다. 병설유치원은 특히나 초등학생을 많이 볼 수 있는 터라 7살은 뭔가 초등학생과 같은 의젓한 행동을 하리라고 주변 성인들은 기대를 하기도 한다.
내가 있었던 반에는 이제 막 출산을 한 엄마가 있는 7살 유아가 있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유독 이 친구가 친구 사이에서 크고 작은 갈등을 만들었다.
실습 3주쯤 가서야 나는 이 친구의 가정사를 어쩌다 알게 되었다.(담임교사와 방과후교사 이외 다른 사람들에게는 개인정보를 잘 공유하지 않는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현관 벨이 울려 내가 나갔다. 엄마가 부랴부랴 내게 그 유아의 약을 주었다. 아기띠를 앞으로 매고 있는 엄마는 많이 바빠보였다. 내게 약을 황급히 주길래 나는 약봉투를 엉겁결에 받았다. 약을 받으면서 투약의뢰서를 꼭 받아야 하는 줄 몰랐어서 지도교사에게 지적을 당했다.
그리고 이 유아는 거의 맨 마지막에 하원을 했다.
잘 놀다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거나 격하게 반응하는 때가 있었다. 그러면 나는 다른 유아들이 다치지 않게 말리느라 바빠서 그때는 자세히 내막을 알지 못했다. 그때의 기억으로는 그냥 엄마가 너무 바빠 아이를 잘 케어하지 못할 것이고, 책에서 배운 대로 빼앗긴 첫째 왕좌를 찬탈한 동생에 대한 막연한 미움이 밖으로 표출되면 저렇게 되는구나라고 느낄 뿐이었다.
이로부터 몇 년 후 6살 터울을 가진 동생이 생긴 첫째와 엄마가 겪는 힘듦을 옆에서 직관하게 되었다. 바로 내 친구의 친구(?)가 그 상황이 된 것이다. 내 친한 친구 혀니의 베프였던 친구 우니의 첫째가 7살일 때, 둘째를 출산하게 된 것이다. 우니는 지방에서 꽤 큰 공부방을 하고 있었다. 우니는 수학을 가르치고, 남편은 영어를, 우니의 동생은 논술과 국어를 가르쳐서 그 지역에서 꽤 알아주는 것 같았다. 수도권에서 영어학원을 운영한 남편의 경험 덕에 어느 정도 체계도 갖추고 있었다. 첫째의 교육은 자신들보다 더 좋은 선생이 전담하고 있었다. 하지만 선생님들과 상담하면 아이가 항상 엄마 보고 싶다는 말을 한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초등4학년부터 고3까지 가르치는 우니의 스케줄은 오후 2시부터 밤 12시까지 꽉꽉 차 있었기에 첫째는 엄마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우니는 육아를 매우 힘들어했기에, 자신이 더 많이 벌어 아이에게 그만큼 보상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아마 첫째가 허니문베이비고 계획에 없던 임신이라 더더욱 그랬을 수 있다.)
혀니를 만나러 가면 항상 우니도 불러내곤 했었다. 그렇게 깊은 얘기를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었고, 우니가 워낙 내향형이라 먼저 다가가는 성격은 더더욱 아니어서 친하게 지내지는 못했었다. 그때 당시에는 나의 남편이 공교롭게도 그쪽 지방에서 일을 하던 중이라, 주말부부였다. 그래서 내가 자주 혀니네로 가서 우니와 함께 만나고 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니가 예기치 않은 제안을 했다. 남편이 여기서 일하니까 이사를 하지 않겠냐는 말을 했다. 나는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 몰랐지만, 속을 잘 숨기지 못하는 우니는 내가 초등부 수학을 맡으면 어떻겠냐고 했다. 이때 한 번 많이 힘든가 보다 생각이 스치듯 떠올랐다. 웬만하면 부탁이란 걸 안 하고 사는 친구인데, 고양이 발이라도 있으면 빌려 쓰고 싶어 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남편과 고이 키워온 사업인데 이걸 자신의 출산으로 인해 잠시 맡아 줄 믿을만한 사람이 없는 것이다. 출산하고 몸을 추스르는 동안 자신이 맡던 수업을 누구에게 잠깐 맡길 만한 상대가 없는 것이다.(이건 아직까지 출생률 저하 원인 중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이다.)
택도 없는 제안이었고, 나를 뭘 믿고 자신의 사업을 맡으라는 거냐며 완곡히 거절하긴 했다.(사실 그때 나는 유치원교사 임용고사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아예 생각이 없기도 했다.)
우니는 출산 이후, 일을 그만두고 두 아이의 육아를 맡아 하긴 했다. 하지만 빼앗긴 왕좌로 인한 아이의 투정은 점점 심해갔다. 그나마 우니는 육아경험이 풍부한 언니가 두 명씩이나 있었고, 게다가 2층과 3층에 각각 살고 있었다. 첫째는 이모들과 사촌형제들과 함께 있어서 그나마 우니에게는 다행이긴 했다. 하지만 첫째는 일에게 뺏겼던 엄마가 집에는 있게 되었으나, 관심은 온통 자신의 동생에게만 주는 것 같은 느낌에 돌출행동을 많이 했다. 자신은 사랑하지 않는 거냐며 울기도 많이 운다고, 유아교육을 공부하는 내게, 전화도 잘하지 않는 우니는 오은영 박사님에게 대하듯 물었다.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없는 나는 그냥 '버티라.'는 말 밖에는 해 줄 수 없었다 그나마 언니들이 첫째를 봐주기라도 하지 않느냐고. 잠깐 아이를 맡길 믿을 만한 사람이 가까이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매우 훌륭한 인적 자원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그나마 유치원 등원할 때 언니들이 돌아가면서 해 주지 않냐고, 갑자기 첫째 아플 때 데려가 줄 수 있지 않냐고. 그냥 마음을 편히 가지려고 노력하고 산후우울증에 걸리지 않도록 노력하라는 말밖에는 해 줄 수 없었다. 사실 엄마의 기분상태가 그대로 아이에게 전염(?)되니까 이건 엄마와 아이를 위한 길이기도 했다.
유치원에서 일하면서 그런 아이들을 만나기 드물다.
특히 외동시절을 오래 보낸 아이는 아이뿐 아니라, 엄마도 힘들다. 아이들의 터울이 적으면 그나마 육아지식이 살아있고 경험이 이어지기 때문에 서툴지 않은데, 이제 초등학교 준비하는 첫째와 세상에 나와 적응을 준비하는 둘째를 동시에 육아하는 것은 난이도가 좀 있는 편이다. 엄마는 외동 두 명을 기르는 것과 같고, 성별과 기질이 다르면 더더욱 그렇다. 모든 걸 새로 시작해야 하는 초보가 아니지만 또 다른 환경때문에 초보엄마가 되어버린다. 첫째에게도 둘째에게도 초보엄마가 되어 버린다. 엄마는 뺏긴 왕좌를 다시 찬탈하려는 첫째의 또 다른 모습에 대처해야 하고, 두 명을 동시에 케어할 수 없을 때 잠시 맡아 줄 믿음직한 상시 단기 인력도 구해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아이대로 유치원을 졸업하고 다시 새로운 사회에 적응해야 하기에 약간의 긴장을 견뎌야 하는데, 집에서조차 새롭게 바뀐 위치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 입장에서도 많은 변화에 대처해야 한다. 그래서 엄마가 둘째 출산 전 아이와 그런 변화에 대처할 수 있도록 충분히 이야기해야 한다. 그런 준비 없이 갑자기 나타난 동생은 자신의 적이라고 인식할 수 있다.
그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동생 얘기를 꺼내는 것조차도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동생 예쁘지 않냐고 물어보면 징징대고 울기만 한다고 말하거나, 다른 아이를 칭찬하는 것을 못 견뎌한다. 심지어 선생님이 칭찬하는 아이를 대놓고 시기하고 사사건건 시비를 건다. 초등학생인 경우는 칭찬받는 그 학생이 조용히 선생님에게 찾아가 자신을 친구들 앞에서 칭찬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고 한다. 자신이 표적이 되고 싶지 않다나.(상당히 똑똑한 친구인 경우다.)
초등학생이면 어쨌든 학교에 출석해야 한다. 초등학생은 부모가 굳이 등하원 시켜주지 않아도 되지만 유치원은 꼭 지정 성인만 등하원시켜줘야 한다. 그래서 이런 경우 등하원 시켜줄 성인이 없는 맞벌이 부부나 이렇게 꼼짝할 수 없는 경우 첫째는 엄마와 함께 있게 된다.
그래서 방학 중 돌봄을 신청하고도 보낼 수가 없다. 나도 이런 일을 겪어 봤기에 그 엄마의 어려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 작은 것도 해결하기 힘든 출산 직후 및 6개월 간은 첫째도 어찌 보면 피해를 입는 것일 수 있다.
게다가 집에서 엄마와의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 첫째인 경우는 유치원에 와서 친구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 교사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 사사건건 크고 작은 갈등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런 행동이 자신도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다. 내가 어쩌나 하고 갈등에 개입하지 않고 관찰한다. 관찰하고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치면 하던 말과 행동을 멈추며 눈을 굴린다. 자신이 억울하다고 생각하면 바로 달려와 나에게 호소한다. 하지만 나는 사건의 전말을 관찰하고 있었기에 모두 알고 있다.
자신의 편이 되어 줄 것 같으면 술술 말하기 때문에 나는 처음에는 양 쪽 말을 다 듣는다. 그러다 계속 듣다 보면 두 쪽 중 한쪽이 편파적으로 말을 하는 것이 포착되거나, 말을 바꾸는 경우가 생긴다. 반면 다른 쪽 편은 일관된 진술을 유지한다. 그러면 그때 자신이 뭔가 잘못했다는 것을 눈치챈다. 하지만, 일단 주장한 자신의 억울함을 어떻게든 피력하려고 애쓴다. 그러면서 며칠 전에 풀지 못해서 억울했다고 느꼈던 것까지(그건 내가 없었던 시간에 일어난 일이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끄집어내어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미 판세는 기울었다.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지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꼴이 되기에 그냥 모르쇠로 일관하고 자신의 말만 얘기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안 들어주면 집에 가서 자기 말을 안 들어주고 자신만 혼낸다고 얘기하나 보다. 나는 어떻게든 장점을 찾아내 칭찬하려고 노력하지만, 집에다 말할 땐 이런 건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엄마의 얘기를 들어보면, 나는 아주 나쁜 선생이 되어 있다.
친구들과 함께 놀게 해 주려고(사실 친구들과 놀고 싶어 하는데 자신이 쥐락펴락하고 싶어서 말도 안 되는 참견을 한다.)하면, 자기를 밀쳤다는 둥 시끄럽게 한다는 둥 모든 걸 시비를 건다. 같이 놀이하는 방법을 알려줘도 자기 마음에 안 들면 그냥 휙 가버리기도 한다. 다른 아이들이 놀이하고 있는 중간에 가서 아까 자신이 가지고 놀았던 놀잇감이니 자신이 가져가겠다고 하기도 한다. 이런 행동을 보이니 상대 아이들 입장에서는 자신의 놀이를 방해하는 친구로 보일 수밖에 없고 오히려 분란(?)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자신들에게 다가오면 자리를 피해버리기까지 한다.(처음에는 그래도 아이들이 끼워주려고 했었다.) 이러고선 집에 가서는 친구들이 자신과 놀아주지 않는다느니, 놀잇감을 나눠주지 않는다고 엄마에게 울면서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할 것이다. 선생님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며, 친구들도 안 놀아준다고 말이다.
안타깝다. 이런 경우 나로서는 도와줄 방법이 전혀 없다. 일단 엄마가 힘들 것이기에 직접적인 도움이 된다고 느끼지 않으면 모두 간섭하는 것으로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다. 나도 주변에서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오롯이 버티며 육아를 해 봤기에 그 느낌이 무엇인지 안다. 그래서 섣불리 말을 할 수도 없다. 나는 남편도 지방에 가 있고, 친정 및 시댁에게 전혀 도움을 받을 수 없어 등하원 시키는 것조차 나에게는 아주 큰 도전이었다.(영유아기관에 맡기고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직장맘들 응원합니다.)
나는 그저 엄마와 빼앗긴 왕좌를 갈구하는 아이가 이겨내기를 기원하는 것 밖에 할 수 없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겠냐고 내게 묻는다면, 나는 페르마가 여백이 없어 증명을 생략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방법이 너무 많기에 말하기 힘들다고 생략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