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크린 말들

이문영

by Iknownothing

그런 것들이 있다.

열기 전 부터 겁이 나게 되는 것들 말이다. 그늘에 가리워진 진실같은, 굳이 잘 알고 싶지도 보고 싶지도 않은 것들.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들추는 것 조차 용기가 나지 않는 것들. 책 <웅크린 말들>은 내게 그런 것들 중 하나였고, 그래서 약속한지 한참을 지나서야 책을 구매했다.


글쓴이 이문영은 억누른 것들을 애써 꾹꾹 눌러 담아 내놓은 듯한 어투로 열일곱개의 이야기를 전한다. 현대의 가장 그늘진 곳, -폐광 광부, 에어컨 수리기사, 대부 업체 콜센터 직원, 이주 노동자, 성 소수자, 한센병 환자, 최저시급 알바생, 고독사로 생을 마감한 이들, 수몰민, 세월호 피해자들의 이야기-. 언어라는 빛이 닿지 않아 깊이를 가늠할 수도 없는 곳만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글을 통해 그들을 조명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그 어떤 이야기들 보다 집중하게 되었고, 글자 하나를 그냥 넘기는 것에 죄책감을 느낄 정도였는데, 그것은 다른 어떤 이야기와도 비교할 수 없는, 어떤 기준으로도 판단할 수 없는, 나의 경험 따위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냉혹한 현실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조그마한 양심 탓인지 나는 작가의 말처럼 ‘마른 눈으로 그들을 훑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그렇다고 나서서 행동하기엔 용기가 나지 았았다. 책장을 넘길 때 마다 그래서 나는 어떠한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하찮고 무력한 대답만이 나올 뿐이었다.


‘정의하지 않는 것들을 정의定義하는 것이 정의正義이다.'


글을 모두 읽고 이 어록을 읽을 때가 되서야 비로소 글쓴이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 나아가 내가 할 수 있으며 해야만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글쓴이가 왜 각 장 앞에 우리가 쉽게 접하지 못했던 소외된 이들의 단어를 정의해 놓았는지, 그들의 이야기를 왜이리도 집요하게 써놓았는지도 알게 되었다. 모두가 언급하지 않아서, 기억하지 않아서 사라지고 있는 것들을 언급하는 것을 글쓴이는 마치 소명처럼 온 책에 걸쳐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때는 나의 의견을 주장하는 것이 편견에 사로잡힌 행위라고 생각했다. 모든 사람은 의견이 다를 수 밖에 없으니 내가 주장하는 것들은 한쪽의 입장만을 이해해 나온 것이라고 믿으며 애써 나의 주장을 숨겨왔다. 적을 만들지 않으니 편하고 합리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조금씩 나이를 먹으며, 또 이 책을 통해 더욱 공고해진 생각이 있다. 말하지 않는 것, 외면하는 것, 정의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은 나에게도, 누군가에게도 아무 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서서 행동할 용기가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의미있는 일은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며, 생각하고, 나의 의견을 만들어 언급하는 것이다.


글쓴이는 말해질 기회를 차지하는 것이 권력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넘쳐나는 글들과 현란한 미디어 속에 말해질 기회를 얻은 것들은 무엇인가. 말해질 기회조차 없이 스러진 것들은 무엇인가. 아무 생각 없이 웃고 떠들던 화제 너머 좁고 어두운 현실 안에 웅크린 탓에 들리지 못했을 수많은 아우성들을 생각하고, 기억하며. 언급하고, 공유하며, 글을 마치고 싶다. 비록 그것이 ‘무능한 실험’일지라도.


“이 책 <웅크린 말들>은 이야기로 포착한 한恨국어들의 모음이다. 말해지지 않을 위험이 있는 존재들과, 그 존재들의 삶과, 그 존재들이 처한 사실을 이야기에 얹어 말의 길을 내려 한 무능한 실험들이다. 이야기하기 위해 차용한 형식들은 어떻게 불려도 상관없다. 다큐여도 좋고, 문학이여도 좋다. 기사여도 좋고, 르포여도 좋고, 논픽션이어도 좋고, 소설이어도 좋다. 단지 무엇이 말해지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묻는 질문으로, 어떻게 말해야 말해질 것인가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말해져야 할 것들이 말해지도록 ‘빈 곳을 메우는 일'로, 다만 그렇게 읽힐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 글쓴이의 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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