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6일로부터,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회를 마주하며.
전쟁이 무서운 이유는, 사람을 숫자로 치환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몇 명이 어떻게 희생됐든 그저 숫자로 치환하면 마음의 부담을 조금은 덜 수 있다. 사람의 죽음에 대해 마음의 부담을 덜어내는 것, 그것은 비극이다. 인간성을 포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성을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죽어간 사람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의 웃음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의 울음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평범하게 살았던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죽어가는 순간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2년 전 이와 똑같은 비극을 겪었다. 전국에 생중계되는 죽음의 현장을 목격하면서도 숫자로만 이야기했다. 그들은 서서히 침몰해가는 배 속에 갇힌 채 숫자로만 이야기됐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거대한 배 한 척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사연이 소개됐지만 어찌 된 일인지 피해자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쟁의 무서움보다 더한 무서움이 나무가 흙을 파헤쳐 뿌리내리듯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갔다. 적극적으로 인간성을 포기한 이들이 당당하게 희생자를 조롱거리로,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드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에 대한 회의가 만연하게 됐다. 그로 인한 피로감 때문인지 사람들은 이제 그날의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정치적이다'며 회피한다.
그들은 배와 함께 가라앉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지 못 했다. 남겨진 가족들의 얼굴을 보지 못 했다. 가라앉은 이들과 남겨진 이들의 웃음을 본 적이 없다. 가라앉은 이들과 남겨진 이들의 울음을 마주한 적 없다. 가라앉은 이들과 남겨진 이들이 밥을 먹고 이야기하며 누구나처럼 평범하게 살아가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가라앉은 이들이 어둡고 차가운 배 속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지 못 했다. 남겨진 이들의 삶이 가루가 되도록 무너지는 모습을 보지 못 했다.
가라앉은 이들과 남겨진 이들은 우리와 똑같은 보통의 사람들이었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인간에 대한 동질감이 있을 때 성립된다. 동질감이란, 그들과 내가 같은 인간임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겪었던 일을 언제든 내가 겪을 수 있고, 나에게도 그런 일이 생겼을 때 누구든 도와주리라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도와주진 못하더라도 내 아픔이나마 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알아주진 못하더라도 인간이라면, 우리가 정말 인간이라면 가슴을 찢어놓는 일만은 하지 않길 바라는 간곡한 절규다.
아직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다. 우리가 그래도 인간이었다는 것을 마음에 거리낌 없이 느낄 수 있을 때가 비로소 해결 시점이 될 것이다. 그전에는 아무것도, 우리는 아무것도 끝낼 수 없다. 2014년 4월 16일을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