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 이면에는 누군가의 사랑이 있다
대면관계 #1 만포면옥
평양냉면. 요즘 '뜬다'하는 먹거리가 되어가고 있다. 아버지와 나는 평양냉면을 사랑해왔다. 아주 오래전 부터. 이 글에서는 수많은(사실 그렇게 많지는 않다) 평양냉면 전문점 중 가장 사랑하는 식당인 연신내 만포면옥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30년 넘게 운영 중인 만포면옥은 향후 몇 십년 이어 갈 수 있을 정도로 고정 단골이 확보되어있다. 동시에 소위 '맛집'이라고 블로그나 SNS에 알려진 곳이 아니다. 때문에 손님이 갑자기 몰려서 맛이 변하거나 서비스가 달라지는 것에 대한 걱정이 없다. 식사 시 주변 환경이 복잡하지 않다. 편하게 맛을 음미할 수 있다. 이렇게 상황적으로 아주 좋은 식당인데, 맛도 참되다.
'평양냉면이란 원래 이 맛이다'라고 단언하고 싶을 정도다.
면으로만 따지자면 봉피양이나 정인면옥 정도가 더 좋긴하지만(장충동 스타일의 찰진 면도 좋다), 냉면 육수맛은 이게 최고라고 단언할 수 있다. 평양냉면을 '슴슴한 맛'이라고 하는데 정말 슴슴한 맛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준다. 어느 곳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동치미와 고기육수의 적절한 조합. '평양냉면이란 원래 이 맛이다'라고 단언하고 싶을 정도다. 평양냉면의 유래가 동치미에 메밀면을 말아먹던 것이므로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평양냉면은 가게마다 맛이 모두 달라서 어느 곳이 제일 맛있다고 단정하긴 어렵지만, 이 곳의 맛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평양냉면 맛이다.
간단하게 넘어갈 수 있는 기본찬과 면수도 맛의 완벽함을 더한다. 보통의 경우, 평양냉면집을 가면 식전에 면수와 김치(동치미 혹은 백김치. 정인면옥은 열무김치도 주는데 그 열무김치와 냉면의 조화가 대단하다)를 준다.
나쁜 음식은 조미료를 넣은 음식이 아니라,
재료의 맛을 살리지 못하는 음식이다.
면수는 말 그대로 메밀면을 끓인 물이다. 만포면옥의 면수는 그냥 메밀면 끓인 물이 아니다. 식감을 돋구기 위해 무언가의 맛을 더했다. 아마도 조미료 종류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데 냉면 먹기 전 입맛을 잘 돌게 해준다. 이 '조미료'라는 점에 반감을 가질 사람들이 있겠지만 조미료를 사용한 음식이 나쁜 음식이라는 생각은 약간 부족한 생각이다. 나쁜 음식은 조미료를 넣은 음식이 아니라, 재료의 맛을 살리지 못하는 음식이다.
김치로 동치미나 백김치를 주는 이유는 그것이 북한식이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다. 황교익 씨의 말에 따르면 컬러TV가 보급되기 전 우리나라의 김치도 백김치에 가까웠다고 한다. 방송에서 색감을 강조하기 때문에 고추가루를 많이 넣은 김치를 대대적으로 보여줬고, 그 결과 새빨간 김치가 맛있는 김치라는 인식이 많이 퍼졌다. 우리 국민에게 '김치'라고 하면 빨간 것만 생각나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평양냉면집들의 김치, 특히 이 곳 만포면옥의 김치는 어르신들이 먹던 우리 고유의 김치가 무슨 맛인지 알게 해준다.
앞서 면에 대한 이야기를 살짝 언급하며 봉피양이나 정인면옥 등보다 만포면옥이 못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지만, 사실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면의 색깔로 보아 메밀과 고구마전분을 섞는 것 같은데, 면을 씹을 때 입 안에서 도는 식감이 좋고 먹기 좋을 정도로 잘 끊긴다. 메밀 함량이 높은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메밀함량이 높으면 음식을 먹고 난 후 입 안에 메밀맛만 남게 될 수 있다(물론 난 그런 맛도 사랑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재미 중 80%이상은 먹는 재미
이러한 가게가 집 근처에 있다는 것은 분명한 행운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재미 중 80%이상은 먹는 재미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만포면옥은 삶의 재미를 주는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면과 인간이 서로를 대하는 이야기인 '대면관계'의 첫 글을 만포면옥으로 잡은 이유도 이것이다. 살아가는 재미. 음식, 특히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면요리에서 느낄 수 있는 재미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앞으로 어릴적 보리차에 국수를 말아주던 엄마의 마음, 거기에 오이지 반찬 하나를 더해 소소한 먹는 재미를 느꼈던 나의 마음 비슷한 것들을 글로 담고 싶다. 우리가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그 행운 이면에는 누군가의 사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