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렙쿤

’ 선‘은 내게 그림의 시작이었다.

내 기억에도 존재하지 않는 내가 처음 끼적이기를 했던 날..

아마도 나는 인생 최초의 선을 그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 조르고 졸라 처음 엄마 손을 잡고 간 화실은

하얀 석고상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고, 연필과 물감이 뒤섞인 묘한 냄새가 풍기던 그런 곳이었다.

등록한 첫날 선생님께서는 내 몸통만 한 큰 종이와 4b 연필을 주시며 오늘은 선긋기를 해보자고 하셨다.

나는 그날 한 시간 동안 팔이 빠지도록 선만 그었다.

흰 종이가 검은색 종이가 될 때까지.

얼핏 보면 선은 늘 똑같이 긋는 것 같았지만 종이 위에 남은 선들은 전부 달랐다.

어떤 선은 진하게 눌리고 어떤 선은 힘이 빠져 흐릿했다.

어떤 선은 끝까지 일관성 있게 그어졌고 어떤 선은 삐뚤삐뚤 제멋대로였다.

선생님은 선긋기를 하는 이유는 기본기를 다지기 위함이라 하셨다.

그렇게 쌓인 선들은 더 이상 선이 아니게 되었고 종이 한 장을 가득 채운 면이 되었다.


선 하나하나 제각각 다른 표정으로 그어졌지만, 결국 내가 한 일은 같은 동작을 끝없이 반복하는 것이었다. 반복의 힘은 무작정 뭔가를 많이 만들어내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차곡차곡 쌓이게 만드는 데 있다. 눈에 띄는 한 번의 성과로는 기본기가 쌓이지 않는다. 결국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서만 실력이 쌓이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일상의 반복과 작업의 반복이 내게는 저 선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아이들의 하루를 준비하기 위해 끼니를 차리고 준비물을 챙기고 등하원을 시키고 잠을 자는 엄마의 삶과 저 선들이 어쩐지 닮아있다.

작업실이 산업단지에 자리 잡은 후로는 그 선들이 내 바깥에도 있다는 걸 더 자주 보게 된다.

아침이면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사람들.

점심시간이 되면 밥을 먹고, 다시 같은 자리로 돌아가 바삐 손을 움직이는 사람들.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을 살아냄은 또 한 번 조용히 긋는 선 일 것이다.

그 노동자들의 하루들이 이런 선에 닿아있다.

삐뚤한 선도 지나고 흐릿한 선도 지나 오늘도 연필을 쥐고 선 하나를 더 긋는 것.

우리 모두 이렇게 ‘살아내기’를 기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