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문인 김남천 소설 속 인물의 편지
애덕*아, 한 서울에 살면서 이렇게 한번 찾아오지두 않기냐. 그래 이 즈음 뭘 하느라구 그리 바쁘냐. 지난 이월 초순에 왔다 가곤 발을 딱 끊고 얼씬 안하니 그 때 나의 말에 노염이 간 거냐. 그리구 대체 너의 ‘그’ 문제는 어찌 되었니? 저 거시기, 기혼한 대학생과 하자(字)성 달린 ‘어떤’ 처녀 의 연애 이야기 말이다. 그 문제의 해결에 어지간이 바쁜 모양이구나. 그리구 송현도 씨 가끔 만나니? 나는 이 즈음 아주 내 자신이 몸에 겹고 벅차서 죽을 지경이다. 계절의 탓인지, 시세의 탓인지, 누구 말마따나 육체의 고민인지 공연히 세상이 답답하다.
*: 수신인 하애덕[河愛德]. 김남천의 소설「세기의 화문」속 인물이다.
지금과 같은 현실과 생활 속에서 자기의 생활 강령을 유지해 나가기란, 우리 불쌍한 청년에게 여간 가쁜 게 아닌가 보다. 나도 정신적 유행병인 ‘불안’에 휩쓸리었는지, 훌쩍 어디 먼 곳으로 여행이라도 하고 싶다. 너도 같이 가면 언니는 막 고마워하고, 그리고 또 꿀사탕 막 사주마. 구라파의 사상가, 예술가들이 현실에 진절머리가 나서, 초현실주의와, 여행과, 모험과, 몽상의 도피 세계로 옮아 간 정신적 분위기가 이 땅에도 찾아오는 모양이다. - 나의 아기여, 나이 누이여, 꿈에라도 보아지이다. 나와 함께 그 곳에 사는 즐거움 - 보들레르의 노래가 비로소 실감이 간다.
원산이나 몽금포는 너무 범속허구, 온천은 더욱 싫구, 우리 한번 제주도로나 가 볼까? 다른 것 다 말고, 그 해녀 말이다. 그 해녀를 안고 한참 뒹굴고 나면 우리 번민하는 현대 여성에게 무슨 신비로운 계시가 내릴 것만 같구나. 새로운 육체의 교훈이 있을 것만 같아서 지금 나는 안절부절을 못한다. 곧 회답해. 응?
7월 초하루 경희**
**: 발신인 이경희[李慶姬], 김남천의 소설「세기의 화문」속 인물이다.
『여성』, 1938년 7월호, ‘영녀(令女) 서간집’ 특집 기사로 게재된 편지. 당시 신여성의 연애와 고민을 엿볼 수 있는 창작 편지 모음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