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오리지널리티를 찾다.

킬러 콘텐츠를 만드는 방법

by 르코

한라산 700고지에서 시작된 개천이 바다와 만나는 곳, 산지천 하구는 수 백 년 역사를 가진 만남의 광장이다. 건천뿐인 제주에서 오직 3개의 하천만이 연중 물이 흐르는데 그중 산지천은 조선시대부터 백성들의 주 식수원이었다. 물이 흐르니 주변으로 마을이 형성되었고 상권들이 생겨났다. 아낙들에게는 빨래터로 이용되었고 동네 아이들에게는 워터파크가 따로없다. 도보 10분 거리의 제주항(과거에는 건입포)은 육지와의 유일한 통로로 다양한 물자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조선 시대에는 배가 난파하여 입도한 중국인들이 작은 부락을 이뤄 살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부터 일제시대, 현대로 넘어오며 신제주가 개발되기 이전까지 산지천은 늘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었다.


1950년대 산지천 빨래터 풍경_출처 : 뉴스제주(http://www.newsjeju.net)


땅 이력 분석과 오리지널리티

주변 시세, 유동인구, 인근 업종 등의 입지분석이 공간을 둘러싼 현재의 상황을 분석하는 것이라면 땅 이력 분석은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땅(지번)이 가진 변화의 과정을 조사해보는 과정이다. 임대료, 이전 업장의 매출과 비용, 관광객 수 등 정량적 근거는 예상 매출을 만드는 자산이 되고 역사적/지리적 특성과 같은 정성적 근거는 공간의 컨셉, 나아가 브랜딩의 기초 자산이 된다.

산지천 끝자락에 위치한 연면적 250평의 5층 건물. 50대 부부가 운영하던 게스트하우스를 임대했다. 객실과 F&B공간이 있는 호스텔로 리노베이션 하기 위해 공간 기획을 하던 중, 난데없는 역사 공부가 시작됐다. 해당 지번의 과거(?)를 캐다 보니 조선시대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과거로부터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미래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한다. 산지천을 중심으로 펼쳐진 과거의 시간들을 통해 교류라는 땅의 특성을 발견했다. 시간을 관통하는 하나의 속성이자 그 땅만이 가질 수 있는 가치, 나는 이것을 땅의 오리지널리티라 부른다. 공간 기획의 브랜드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컨셉이다. 오직 이 곳만이 가질 수 있는 컨셉이라면 절반은 성공이다. 땅의 오리지널리티는 그 공간만이 가질 수 있는 언카피어블 컨셉인 셈이다.


산지천의 입지

2013년, 지자체에서는 약 400억을 투입해 산지천 주변을 개발하여 탐라 문화 광장으로 탈바꿈시켰다. 물리적 환경은 미화되었지만 기대했던 우범화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골목 안쪽으로 조금 밀려났을 뿐 성매매 포주들이 밤만 되면 천변으로 나와 영업을 했고 노숙인과 취객들이 아침부터 밤까지 큰 소리로 싸워댔다. 일 2만 명이 찾는 동문시장이 5분 거리에 있지만 산지천은 누구도 찾지 않는 그야말로 유동인구가 '0'에 수렴하는 곳이었다. 한편, 교통 편의성, 높은 배후 수요, 주차 편의성, 높은 도보 접근성 등의 장점도 갖고 있는 곳이다.


산지천의 니즈

과거에는 사람들이 식수를 얻고자 산지천을 찾았다. 식수는 당시 사람들에게 니즈 needs가 명확한 산지천만의 킬러 콘텐츠다. 이젠 스마트폰 터치 몇 번이면 삼다수가 내 집 현관으로 오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 산지천으로 와야 할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탐라문화광장이 제공한 미화된 산지천은 현대인들의 니즈가 아니기 때문에 텅 빌 수 밖에. 제주에 아름다운 곳은 너무 많으니까 말이다.

지금도 산지천에는 물이 흐른다. 불과 5분 거리의 북쪽으로 탑동, 남쪽으로 동문시장에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땅의 오리지널리티는 유효하다. 다만 살아가는 방법도 여행하는 방법도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바뀌어버린 오늘날, 그에 맞는 니즈를 찾아내는 것이 관건이었다. 산지천에서만 할 수 있는 킬러 콘텐츠를 찾아 제공한다면, 분명 승산이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오리지널리티를 살리는 킬러 콘텐츠

발 디딜틈 없이 북적였다. 오픈 행사에 약 120명의 사람들이 찾았다. 1층에 마련된 7평의 펍으로는 소용이 없었다. 주차장, 바로 앞 공터, 산지천변까지 사람들이 돗자리를 깔거나 서서 행사를 즐겼다. 20-30대 제주도민들이 주를 이뤘고 호스텔을 찾은 여행객들도 더러 참여했다. 2019년 4월, 로컬 커뮤니티 호스텔 베드라디오는 산지천을 북적이며 시작을 알렸다. 이 땅이 가진 오리지널리티, 교류의 특성을 살려낼 킬러 콘텐츠는 스트릿 커뮤니티였다.

제주에서 활동하는 스케이트보드, 디제잉, 비보잉, 러닝 크루들을 차례로 만나 함께 놀아보자고 했다. 우리가 아닌 그들이 주인공인 행사를 만들고자 했다. 이름하여 산지비치파티. 산지천은 그들이 놀기에 이미 충분히 좋은 터 였으나 그들이 이 곳에서 놀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좋은 음악을 큐레이션하여 그들이 노는 데에 필요한 분위기를 연출했고, 을 저렴하게 제공하여 부담없이 마실 수 있도록 했을 뿐이었다. 성공적인 오픈파티 이후에도, 이들은 지속적으로 방문했다. 왜 이제야 생겼냐며. 여행자, 지역민, 외국인 할 것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춤을 추고 교류를 했다. 관광객들을 위한 공간이 대부분인 제주에서 지역민이 갈 만한 아지트가 생겨난 것이다. 산지천은 지역 커뮤니티들의 놀이터가 되었고 우리는 제태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