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반 보만

팔리는 공간을 만드는 반 보 앞서는 기술

by 르코

여행자에게 가장 필요한 콘텐츠는 무엇일까?라는 물음에서 시작했다. 네이버나 인스타그램이 제주 여행정보를 습득하는 1순위 경로이긴 하지만 여행자가 가장 신뢰하는 정보는 로컬이 가는 곳이나 로컬이 직접 추천해 준 곳 아닐까. 여행자에게 가장 필요한 여행 콘텐츠는 지역민(로컬)과의 만남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호스텔 1층에 위치한 바를 지역민과 여행자들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방향을 정하고 로컬의 광장이라는 의미로 로스크 Losq라고 이름 지었다. 여행자와 지역민이 만나 서로 대화를 하다 보면 로컬만 아는 여행지나 맛집들이 자연스럽게 공유될 것이고 그들이 함께 여행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기획 단계에서 그렸던 풍경들이 실제 운영에서 펼쳐지기도 했지만 극히 드물었다. 지역민을 만나는 것은 고객들이 로스크를 방문하는 핵심적인 이유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여행자는 호스텔의 1층에 있는 분위기 좋은 바이기 때문에 방문했고 지역민은 산지천 부근에 분위기 좋은 바가 생겼기 때문에 방문했다. 결과적으로 로스크는 가까운 곳에 있는 분위기 좋은 바에 머물렀을 뿐이었다. 엣지 있다고 생각했던 컨셉이 밍밍해져 버렸다.


제주의 원츠

제주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 가장 강력한 여행 콘텐츠이다. 한라산, 올레길, 제주바다, 오름과 같은 자연 관광지는 제주에 와야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자연경관 감상은 주요 참여활동 99.2%(제주관광공사_2019년)로 제주 여행의 1순위 콘텐츠이다. 음식의 경우는 지리적 요인보다는 관성이 크게 작용한다. 제주의 모든 음식은 전국 어디서나 맛볼 수 있지만 제주 하면 OOO라는 경험의 공식이 강하게 굳어진 것들이 많다. 흑돼지는 제주 토종 종자-제주 흑돼지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지자체에서 지정한 단 한 곳에서만 맛볼 수 있다-도 아니며 그 마저도 대한민국 어디서나 맛볼 수 있지만 제주에 가면 흑돼지 먹어야지라는 공식은 콘크리트처럼 단단하다. 터치 몇 번이면 더 싱싱한 귤이 나보다 빨리 집 앞에 도착해 있을텐데도 공항에서 귤 상자를 이고 지고 가는 사람들을 볼 때면 새삼 관성의 힘을 느낀다. 제주를 방문하는 여행자들은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제주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여행의 공식을 떠올리고 있다. 바로 제주의 원츠이다.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것들을 제안하는 것은 설득의 과정이 필요하고, 여행자들은 돌아다니기 바빠서 설득을 당할 시간이 없다. 가장 좋은 여행 콘텐츠는 지역민과의 만남이라는 가설이 빗나간 이유이다. 기존의 공식을 약간만 비틀어 내는 것. 즉, 반 보만 앞서갔어야 했다.


운영자의 원츠

제주 동쪽 송당리에 위치한 친봉산장은 제주의 옛 돌 창고를 개조하여 만든 산장 컨셉의 카페 겸 바이다. 가게 옆으로는 주인장이 타는 것으로 보이는 검은 바이크가 세워져 있고 키우는 큰 개가 입구를 지키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왠지 그럴 것만 같았던, 턱수염 덥수룩한 주인장이 반갑게 맞는다. 산장 컨셉으로 가게를 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산장을 만들었는데 들어와서 아이리쉬 커피 한 잔 하고 가라는 듯한 뉘앙스다. 쿨내 진동. 넓은 산장 한 구석의 복층 공간이 그의 거처이다. 가게 겸 집인 셈이다. 전기를 쓰지 않기 위해 매일 촛불 100여 개를 태워 밤을 밝힌다는 그는 진정 자연인이자 자유인이다. 인테리어, 소품, 메뉴, 서비스 응대, 맛까지 이어지는 공간의 총체적 경험에 어디에도 어색한 구석이 없다. 운영자의 원츠는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고 차별화된 브랜딩을 가능하게 한다. 공간은 주인을 닮고, 주인을 닮은 공간은 그 자체로 온리원일 수밖에 없다.


제주의 원츠+운영자의 원츠=팔리는 공간


로스크를 리브랜딩 하기로 했다. 기대한 성과에 못 미친 기획이었기 때문이다. 비용의 문제로 공간의 인테리어는 그대로 두는 선에서 모든 것을 바꿔보기로 했다. 여행자들이 이 곳에 와야 하는 이유를 세팅하기 위해 가장 먼저 우리 호스텔을 방문하는 타겟이 가진 제주의 원츠를 나열하여 그중, 우리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선별하는 작업을 했다. 가장 적합한 아이템을 선정한 후, 운영 주체인 우리가 잘하고, 하고 싶은 것들을 녹여냈다. 이후, 브랜딩, 메뉴 개발, 마케팅 계획, 공간 스타일링 등 오픈을 위한 리뉴얼 작업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치맥 말고 멜맥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 걸고 멜튀김 전문점 멜맥집이 오픈했다. 제주 토박이들이 즐겨먹는 멜튀김과 중문의 마이크로 브루어리에서 생산한(제주에서만 맛볼 수 있는) 수제 맥주를 들여와 판매했다. 디자인을 담당한 멤버가 서울에서 DJ 활동을 하고 있어 이태원 클럽에서나 들을 수 있는 음악들을 큐레이션 하여 업장에 틀었다. 멜튀김과 클럽 분위기는 누구도 상상해본적 없지만 누구나 끄덕일만 조합이었다. 멜튀김이 생소한 여행자들을 위해 멜맥과 치맥을 병치시키는 캐치프레이즈를 만들어 자연스럽게 치맥을 먹는 것과 비슷한 경험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했고, 나아가 제주까지 와서 치맥 먹을래?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여행자들이 멜튀김을 잘 몰랐던 이유는 기존의 멜튀김 가게들이 4-50대 지역민들을 타겟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30대 여행자들이 원하는 분위기와 입지라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고 이는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코로나 2차 유행이 막 시작되던 시기에 오픈했음에도, 월평균 매출이 이전 업장의 월 최고 매출(코로나 이전, 성수기)을 넘어섰다. 딱 반 보 앞에서, 멜맥집은 현재도 여행자와 지역민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고 순항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