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에스프레소 BAR의 유행이 심상치 않습니다. 뜨아와 아아로 양분된 커피 시장에 쓰디쓴 에스프레소가 비집고 들어와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모양새입니다. 제가 다니는 회사 근처에도 유명한 에스프레소바가 있는데요. 이름은 ‘리사르 커피'입니다. 3평쯤 될까요. 좁은 공간에서 한 잔에 1,500원짜리 커피를 파는 에스프레소 전문점입니다. 덕분에 우리 회사는 리세권이라 불리기도 하죠. 출근길에 들르면 바쁜 직장인들이 가게 오픈 전부터 줄을 서 있습니다. 점심시간에 들러도 가게 밖으로 족히 스무 명은 줄지어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요. 테이블에 기대서서 한 명당 두세 잔씩은 마시는데 그래봤자 아메리카노 한 잔 값이니 부담이 없습니다. 주로 혼자나 둘이와 서 서서 마시다 보니 회전은 또 얼마나 빠른지 줄이 금세 줄어듭니다. 줄 서서 오가는 이야기들도 이렇습니다. “오우야 가 봤어? 바마셀 가 봤어? 난 OOO가 좋더라"
에스프레소의 유행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최근 몇 달간 다녀온 곳들의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BAR형태의 공간이 많았는데요. ‘왜 요즘 주변에 BAR가 많은 걸까?’라는 물음이 생겼습니다. 내가 선택한 이유도 SNS나 지인 추천으로 방문했으니 나만의 경험은 아닙니다. BAR가 일반음식점으로 분류되다 보니 아쉽게도 BAR만의 증가 추세를 데이터로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새로움의 유효기간이 갈수록 짧아지죠. 요즘처럼 변화가 빠른 시대에 오프라인 공간이 통계로 잡힐 때면 기획자로서는 한발 늦은 것이라 며칠 전 필드트립을 다녀왔습니다. 전통주, 음식점, 칵테일, 카페 등 다양한 종류의 Bar를 탐방했습니다. 그때의 감상을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BAR의 본질은 접객입니다. 중세 시대 개인 가정에서 직접 만든 맥주나 포도주가 남으면 손님에게 대가를 받고 팔았습니다. 집에 긴 장대를 걸어 놓고 그 장대 끝에 빗자루나 화환을 걸어 영업 중임을 표시했다고 합니다. 개인 공간이 BAR의 시작이었던 만큼 집에 온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는 것이 BAR의 본질입니다. 화폐 경제가 활성화되고 원거리 교통이 가능해지면서 공공 술집이 출현하였습니다. 일종의 접객업이 탄생한 것이죠. 당시의 접객업은 숙박, 식사 그리고 술을 제공했습니다. 이것이 규모가 커지고 영업적 성격이 짙어지면서 오늘날의 호텔로 이어졌습니다.
객실도 중세에는 개인 가정에서 남는 방을 내어주다 보니 영업장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개인 공간이 영업 공간으로 바뀌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카운터인데요. 긴 카운터는 판매자와 구매자의 역할을 구분했습니다. 카운터 안쪽에는 주인, 바깥쪽은 자연스럽게 손님이 자리했습니다. 카운터는 19세기 영국에서 처음 출현했는데 이것이 영미권으로 확산되고 BAR라고 불리면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주인과 손님이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술을 마시는 Bar가 19세기 초 영국 대도시에서 처음 생겨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BAR를 산업혁명의 산물이라 부르기도 하는데요. 증기기관이 산업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다면 BAR는 노동의 기폭제였습니다. 당시 BAR에서는 브랜디나 진과 같은 도수 높은 술을 판매했습니다. 서서 마시는 바테이블은 휴식 시간이 짧은 노동자가 독한 술을 빠르게 마시기에 딱 좋은 장소였습니다. 런던에서 가장 큰 술집은 1주일에 27만 명의 손님을 접대했습니다. 한 시간에 400명의 손님이 다녀갔다고 하니 컨베이어벨트가 따로 없습니다.
2018년, 제주에서 호스텔 개발 회사를 창업했습니다. 호스텔은 점차 고급화되고 호텔은 젊어지면서 둘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추세입니다. MZ세대가 가장 큰 소비집단이 되었기 때문인데요. 둘 모두 같은 소비자를 타깃 하다 보니 이들의 니즈를 반영하는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은 일견 합리적입니다. 호스텔과 호텔이 비슷해지고 있지만 절대 같아질 수는 없는 가치가 있죠. 바로 여행자 간 ‘교류'입니다. 대부분의 호스텔에서 여행자들의 소통은 부대시설인 PUB이나 BAR에서 이루어집니다. 물론 ‘OO BAR’라는 사이니지를 걸어두고 술을 제공한다고 해서 여행자들이 자연스럽게 교류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나 손님이 모두 한국인이라면 난이도가 매우 높습니다. 창업 후 개발한 첫 지점은 객실이 14개인 아담한 호스텔이었습니다. 다행히 1층에 7평 정도의 공간이 있어 공용 공간을 둘 수 있었는데요. 이곳에 여행객들이 교류할 수 있도록 BAR를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여행이 피로를 풀 적당한 술을 준비하고 여행지의 특색을 담은 메뉴를 개발했습니다. 낯선 여행자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스탭도 채용했거요. 그리고 무엇보다 바테이블에 가장 공을 들였습니다.
우선 테이블의 형태는 ‘ㄱ'자로 정했습니다. 정사각형의 작은 공간이라 선택지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다음, 높이는 100cm로 정했습니다. 바 안쪽에서 접객을 담당하는 직원과 바테이블에 앉은 손님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한 높이입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폭인데, 여기서 고민에 휩싸였습니다.
애드워드 홀은 프록세믹스(Proxemics, 공간학)를 창시한 미국의 문화인류학자입니다. 프록세믹스는 인간의 감각세계가 공간을 구조화하고 사용하는 방식을 의미하는데요. 그의 연구가 담긴 [숨겨진 차원]이라는 책은 건축이나 인테리어를 배우는 학생들에게는 필독서로 통합니다. 문화인류학자가 쓴 책에서 BAR테이블의 폭에 대한 인사이트를 얻을 줄 상상이나 했을까요. 책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저자는 인간관계의 다양한 거리를 4단계로 나누어 정의합니다. 1단계 밀접한 거리는 15~45cm로 후각과 방사열을 느끼게 되는 거리입니다. 사랑을 나누고 싸우고 위로해 주고 보호해 주는 등, 연인과 같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서만 허용되는 거리입니다. 2단계 개인 거리는 45~120cm입니다. 서로의 팔을 뻗어 닿지 않는 거리로 신체적 지배의 한계가 일어납니다. 주로 친구나 가족에게 허용되는 거리입니다. 3단계 사회적 거리는 120~360cm입니다. 우리가 회사에서 흔히 경험하는 거리입니다. 동료나 상사와의 대화에서 유지되며, 개인 업무공간의 최소한의 확보거리가 됩니다. 4단계 공적 거리는 360cm 이상으로 대통령이나 주요 연사의 주변으로 자동적으로 형성되는 거리입니다. 마주하는 대상과 매 순간 거리를 잴 수는 없는 노릇이나 책을 읽으면서 몇몇 상황들을 떠올려보니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책을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셰어 테이블이 있는 카페를 간 적이 있습니다. 요즘의 유행이기도 한 쉐어 테이블은 서로 모르는 사람들도 마주 앉아서 커피를 마시거나 일을 합니다. 책의 내용에 비추어 다양한 쉐어 테이블의 크기와 용례를 비교해 보니, 테이블의 폭이 80cm에서 최대 100cm까지는 일행이 있는 경우에 좋습니다. 친구들과 식사 겸 반주를 하다가 이야기가 달아올랐는데 2차로 소파가 있는 술집을 가면 이야기의 흐름이 뚝 끊기는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식당에서는 테이블 폭이 100cm를 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소파가 있는 술집은 그보다 거리가 멀죠. 120cm 이상의 폭을 가진 테이블은 맞은편에 모르는 사람이 앉아도 서로 어색함이 없습니다. 다만 테이블의 폭이 120cm인 경우는 비용이 많이 들고 공간도 많이 차지해서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없습니다. 100cm 이하 쉐어 테이블을 쓸 경우는 테이블 중앙에 조명이나 화분을 둬서 시선을 일부 차단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밀접 거리는 부담스럽고 사회적 거리는 서먹합니다. 바의 폭은 주인과 손님이 120cm를 넘지 않는 개인거리가 적합합니다.
외로움 비즈니스는 유망합니다. 미국의 한 조사기관은 2025년까지 70%의 인력이 한 달에 5일 이상 원격으로 근무할 것이라고 합니다. 같은 대상에게, 이때 느끼는 가장 큰 불편이 무엇인지 물었는데요. ‘커뮤니케이션의 어려움’과 ‘외로움'을 꼽았습니다. 글로벌 보험사 시그나가 18세 이상 성인 1만 44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61%가 외로움을 느끼고 점점 더 악화될 것 같다고 답했고요.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20대를 대상으로 한 최근 설문조사에서 10명 중 6명이 외롭다고 답했습니다. 디지털 혁신이 가속화될수록 외로움 비즈니스가 성장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넓어진 사회적 거리를 디지털 기술과 플랫폼이 채워나가고 있습니다. 글로벌 오디오 플랫폼이 스푼라디오의 경우 사용자들이 가장 많이 접속하는 시간대는 밤 9시에서 새벽 2시라고 합니다. MBC예능 <나 혼자 산다>는 2013년 첫 방송을 했는데 올해로 11년 차 장수 프로그램이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외로움을 보면서 자신의 외로움에 위안을 얻는 것이죠. 오프라인에서도 외로움을 달래는 커뮤니티 시장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중 2015년 문을 연 오프라인 독서모임 스타트업 트레바리는 가장 촉망받는 커뮤니티 비즈니스 중 하나였습니다. 독서 모임이긴 하나 지적 갈증 외에도 인간관계에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에게 오프라인에서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날 수 있는 매력적인 솔루션입니다. ‘세상을 더 지적으로 사람들을 더 친하게’는 이 회사의 미션입니다. 트레바리는 2020년 기준 누적 회원 5만 명을 달성하고 4년 반 만에 100배 성장하여 소프트뱅크스, 알토스 벤처스 등으로부터 누적 90억 원의 투자를 유치하죠.
나 홀로 사장님이 늘고 있습니다. 인건비가 꾸준히 상승하고 코로나 시기를 통해 불가항력의 불확실성을 경험했습니다. 생계를 위한 경제활동은 불가피하고 투자비와 운영비를 최소화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21년 연평균 자영업자 수는 551만 3000명을 기록, 1년 전보다 1만 8000명 감소했으나 1인 자영업자는 오히려 4만 7000명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렇듯 주변에 BAR가 많아진 배경에는 1인 자영업자의 증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BAR와 코로나 시기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3가지로 짚어봤습니다.
첫째, 불확실성에 따른 초기 투자비 최소화입니다. 작게는 5평만 있어도 BAR를 만들 수 있습니다. 공간이 작기 때문에 초기 인테리어 비용이 낮죠. 코로나가 얼마나 장기화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죠. 연내에도 몇 번씩 정부의 지침이 바뀌는 시장의 불확실성이 큰 상황에서 초기 투자비를 최소화하는 것은 창업의 필수 전략입니다. 둘째, 인건비 상승에 따른 고정비 최소화입니다. BAR는 규모가 작고 주방을 둘러싸고 테이블이 위치해 있어 제조와 서빙을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구조인데요. 직원을 고용하지 않고도 혼자 운영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셋째, 외로움을 해결의 니즈입니다. 앞서 외로움 비즈니스의 성장을 이야기했습니다. 비대면 소통이 증가할수록 대면 소통은 간절해집니다. 동네 BAR의 주인장은 가볍게 몇 마디 주고받을 정도의 친분을 갖기에 좋죠. 또한 약속의 주도권을 내가 쥐고 있고 언제든 가면 만날 수 있으니 요즘 시기에 맞는 최고의 관계가 아닐까요.
BAR로 대동단결하려는 걸까요. 탐방지를 조사하면서 다양한 BAR형태의 F&B공간을 알게 됐습니다. 서양 술과 우리나라의 지역별 전통주를 섞어 칵테일을 만드는 BAR, 겉모습은 와인 BAR인데 손님들이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BAR, 식사가 될만한 요리를 함께 파는 칵테일 BAR, 지역별 전통주와 요리를 판매하는 현대적인 스타일의 모던한식 BAR, 퇴근길에 서서 간단한 식사와 사케를 마실 수 있는 일본식 BAR, 글의 서두에 언급한 에스프레소 BAR 등입니다. 물론 BAR라는 명칭이 상호에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공통점은 소규모 공간에 높은 테이블이 있고 손님과 주인이 마주 보며 소통하는 구조의 공간이라는 것이죠. 앞서 호스텔과 호텔의 기능과 형태가 점차 비슷해지는 경향을 보이는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구매력 높은 소비 집단인 MZ세대는 술집도 가고 식당도 갑니다. 변화한 외부환경에서 이들의 니즈를 만족시키는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수단은 공유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자영업 비중은 전체 근로자의 25%로 OECD 회원국 가운데 상위권입니다. 높은 자영업 비중과 1인 자영업의 증가, 인건비 상승, 코로나 시대의 경험, 1인 가구 증가 등의 요인으로 BAR를 위시한 소규모 F&B업장은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보입니다.
19세기 초의 BAR가 산업혁명의 산물이었다면 오늘날의 BAR는 디지털혁명과 코로나 시대의 산물이 아닐까요. 디지털 세상이 커지고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시대, BAR는 동네 단위의 외로움 해소 솔루션으로 더욱 각광받을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