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성에서 다양성 시대로의 진화
"나는 전문성도 없어서 막상 나가면 할 것도 없어."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가 제게 푸념하길래 제가 말했습니다.
"친구야, 이젠 전문성이 아니라 다양성을 가진 사람이 돈을 벌어."
중학교 2학년인 조카와 조카의 친구가 TV앞에 앉아 (유튜브로) 몇 시간째 같은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습니다. 옴짝달싹도 않고 보길래 무슨 프로그램인가 물었더니 레고를 해킹하여 만든 원피스 피규어를 리뷰하는 콘텐츠라고 합니다. 저토록 열렬한 팬(당신을 3시간 이상 눈도 못 떼도록 붙잡아두는 서비스는 무엇이 있나요? 쉽지 않습니다.)을 둘씩이나 둔 유튜브 운영자는 <Late Autumn늦가을>입니다.
늦가을 님의 시계를 채널 개설 시점으로 돌려볼까요. (취업은 안 하고 or 회사를 다니며)피규어를 만지작 대던 친구가 피규어 리뷰 유튜브를 개설합니다. 주변의 반응은... 예상이 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영상을 하나씩 업로드하기 시작한 것이 어느덧 5년, 유튜브 채널 늦가을은 현재 구독자 30.6만 명, 총 조회수 1억 8천만 회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광고 수입이 있겠습니다만 피규어 아이템 상점도 운영하는 것을 보니 비즈니스로써도 틀을 갖추었거나 이미 매출이 충분히 높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늦가을 님과 같이 자신이 좋아하는 콘텐츠로 돈을 버는 사례는 끝도 없이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유튜브가 돈이 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유튜브의 매출은 계속 오르게 됩니다. 카지노에서 100번 중 100번 모두 돈을 버는 사람은 딱 둘 뿐입니다. 카지노 회사(게임수수료)와 정부(세금)입니다. 게임에 참가한 사람은 '지금' 돈을 잃거나 '나중에' 잃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지만 갖습니다. 플랫폼은 목적이 아닌 수단입니다. 따라서 유튜브가 아니라면 과연 돈이 되는 것(본질)이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시작해 볼 수 있습니다.
"덕후라야 돈을 버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덕후가 될 정도로 꾸준하게 파 온 관심사가 없는 '나'가 남습니다. 그리고 좋아하는 것을 일찍이 발견하지 못한 '나'를 자책하거나 '나는 좋아하는 게 뭘까'라는 답 없는 고민의 수레바퀴로 들어가게 됩니다. 답은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좋아하는 것은 (별안간)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최초의 호기심에 꾸준한 실행이 더해질 때 '좋아함'이 나타납니다. 또한 기성세대의 관점으로 만든 언어(덕후)로 현재 세대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모순입니다. 따라서 덕후가 아니라면 과연 돈을 버는 것(본질)이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시작해 볼 수 있습니다.
빅데이터 전문 기업 바이브 컴퍼니의 설립자이자 스스로를 시대의 마음을 캐는 ‘마인드 마이너’라 부르는 송길영 님은 그의 저서 <시대 예보>에서 ‘핵개인'이라는 개념을 주장합니다. 대가족 제도가 붕괴되면서 2000년대 ‘핵가족'이라는 개념으로 사회 현상을 설명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저자는 오늘날은 가족이라는 최소 공동체마저 붕괴되면서 다분화/다양화된 개인이 살아가는 ‘핵개인’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합니다. 3인 가족 중 어머니 한 명의 취향만 저격하면 팔 수 있었던 3-4인용 소파를 이제는 어머니, 아버지, 아들/딸의 전혀 다른 취향과 니즈에 맞는 1인용 소파 3-4개를 팔아야 합니다. 핵개인으로 분화된 시대의 개인은 지역, 학교, 회사,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자신의 정체성을 의탁하는 대신 관심사, 취향, 가치관 나아가 삶의 방식을 스스로 설정하고 이를 공유하는 사람들과 연대를 맺습니다. 과거에 ‘5-60대 주부’라는 대 단위의 전체주의적 정체성이 지금은 ‘영웅시대(5-60대 여성이 대다수인 가수 임영웅 님의 팬클럽 명)’라는 소규모의 개인주의적 정체성으로 변모했습니다.
기성세대가 살아온 시대는 가족단위 고객에게 소파를 파는 '수직'의 시대입니다. 회사라는 조직에서의 개인은 사원, 대리, 과장, 부장, 임원으로 수직적 자아실현을 꿈꿨습니다. 이때 우열을 가려 단계를 올라가는 데 필요한 것이 전문성입니다. '연차가 쌓이면 전문성이 높다'는 기본 가정으로도 충분히 조직이 운영되고 성장이 가능한 시대였습니다. 과거 전문성의 표상이라 여겨졌던 의사, 변호사와 같은 소위 말하는 '사'자 직업은 국가라는 조직에서의 수직적 자아실현입니다. 여기에는 '시험을 잘 보면 전문성이 높다'는 기본 가정이 깔려 있습니다.
전문성이 생명을 다했습니다. AI가 대체할 유망한 직업의 대부분은 앞서 언급한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더 전문적일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냉장고도 세탁기도 노트북도 이미 충분히 모든 일을 해내는데 더 성능 좋은(전문적인 기술) 가전을 개발할 필요가 있을까요.
오늘날 연차와 시험(점수, 석차)은 숫자 그 이상의 어떤 정보도 담고 있지 않습니다. 핵개인에게 소파를 팔아야 하는 '수평'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회사의 직급은 사라지고 사원부터 임원까지 모두 '님'자를 붙여 이름을 부릅니다. OO 님은 PPT를 잘 만들더라, OO 님은 기획안을 기가 막히게 쓰더라, OO 님은 워라밸을 위해 칼퇴하더라... 등등 각자의 이름이 호명되면 그 사람의 역량과 정체성이 이름에 저장됩니다. 과거 조직에는 5개의 정체성(성실한 사원, 치이는 대리, 잔소리 과장, 무능한 부장, 선택받은 임원)만 있었다면 오늘날 조직은 개인의 수만큼의 정체성이 존재합니다. 이들은 자아실현을 조직 안에서만 달성하지 않습니다. 옆그레이드(이직)를 일삼고 회사 사람들은 모르는 부캐도 하나씩 있습니다. 부캐가 본캐보다 돈을 많이 벌기 시작하면 미련 없이 퇴사합니다.
다양성만으로 돈이 되지는 않습니다. 다양성은 필요조건입니다. 돈을 버는 데 충분해지기 위해서는 '진정성'이 따라붙어야 합니다. 늦가을 님은 채널을 운영해 온 5년 간 1.5일 당 한 개의 영상을 올려 현재 그 수가 1200개를 넘어섰습니다. 누군가의 진정성을 알기란 어렵습니다만 오랫동안 그것이 지속되고 있다면 진정성이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따라서 지속성은 진정성을 보증합니다.
유튜브가 돈을 버는 이유는 '다양성' 때문입니다.
덕후가 돈을 버는 이유는 '다양성+진정성' 때문입니다.
유튜버 늦가을 님이 돈을 버는 이유는 다양성과 진정성이 요구되는 세상에, 그것을 충족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다양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돈을 버는 사람은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다양성(그리고 꾸준함)을 가진 사람입니다.
극 F친구를 위한 극 T친구의 위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