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 페퍼로니가 이전하여 부암동 언덕의 근사한 곳에 자리 잡았다. 이름은 Prep. 서울미술관이 창으로 보이는 그야말로 미술 식당이다. 부암동도 그리 시끌벅적하지 않지만 이곳도 적당히 소란한 것이 좋다. 탁 트인 뷰에 주변의 녹음과 햇살이 큰 창으로 비쳐 들어와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예약한 덕분에 VIP 테이블-다른 곳과 떨어져 모임에 좋다-에 6명이 둘러앉았다. 놀랍게도 분위기가 시작부터 화기애애하다. 의도치 않게(의도한 것이라 모두 날 의심했지만 분명 의도치 않게) 청일점이 되어 앉아있으니 투명인간 인 듯 가이드 인 듯 나의 역할은 그렇게 되었다. 뭐 아무렴 어때. 따듯한 햇살과 맛있는 음식, 그리고 주말 낮에 딱 어울리는 샤도네이 와인 한잔에 함께 한분들의 표정이 밝아지니 기분이 좋았다. 메뉴도 이것저것 주문해 함께 나눠 먹었는데 그중 단연 으뜸은 ‘우거지 파스타'이다. 맙소사 우거지 파스타라니, 궁금해서 500원이라도 주고 싶었지만 일단 주문했다. 얇은 스파게티니 면을 사용해 마치 우거지 비빔국수 같은 비주얼인데, 깔끔한 올리브 오일 소스와 우거지를 참 잘 어울리게 만들어놨다. 한 번 더 주문할 만큼 가장 추천할 메뉴이다. 샐러드가 조금 아쉬웠지만 다른 메뉴들도 나무랄 데 없이 맛있고 직원들도 친절하다. 친절한 이유는 우리의 단체 사진을 웃으며 흔쾌히 찍어줘서랄까. 처음 만난 분들일까 싶을 정도로 서로 웃고 떠들며 식사를 했다. 거기엔 셀카 봉이가 큰 몫을 했다. 매우 유용한 도구임에 틀림없다.
서울미술관이라는 이름이 익숙한 듯 생소했다. 이곳은 서울시립미술관이 아닌 사립 서울미술관이다. 부암동에 환기미술관, 자하미술관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데가 있어??”하는 사람이 많은데 개관한지 2년 된 새것 같은 미술관이다. 위치도 좋고 무엇보다 석파정이라고 하는 흥선대원군 별서가 미술관과 연결되어 있어 유적지 산책도 즐길 수 있다. 또한 미술전시회와 연계된 다양한 문화행사를 개최하고 있어 관람객 입장에서는 행운이다. 요즘 미술관에서 음악공연을 많이 하는 것은 나름의 자구책이고 괜찮은 시도로 보인다. (단 미술관의 기본 기능에 충실하다면) 미술을 성인들에게 다가가게 할 때는 중간 연결고리가 필요하고 생각한다. 미술 식당에 ‘맛집'이라는 연결고리를 두듯, 대중문화의 한 축인 ‘음악'이 전시관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건축물은 마치 언덕의 한쪽을 깎아내 네모진 건물을 채워 넣은 듯한 모양새다. 재미있는 공간에 비해 건축물은 그리 특색 있지 않다. 과감한 설계를 시도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건축물의 아쉬움이 하찮을 만큼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으니 그곳은 ‘면세점'이다. 어디선가 중국어가 들리길래 뭔 일인가 보니 전세버스에서 많은 관광객이 내려 미술관 1층의 면세점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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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슨트에 맞춰 전시를 관람했다. 2 개층에 전시된 작품을 다 보는데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은듯하다. 전시를 조금 더 깊이 있게 관람코자 도슨트 시간에 찾는 건데, 오히려 관람에 방해가 될 정도로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듯하다. 매끄럽지 않은 설명과 빠른 이동도 문제지만 질문에 대한 대응도 아쉽다. 석파정에서 음악회를 여는 것보다 전문적인 도슨트를 배치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본질에서 벗어난 시도들은 지양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강영호 작가의 사진 작업이었다. 프레 임안에 카메라와 피사체와 작가 순으로 중첩되어 들어있다. 마치 하나의 퍼포먼스를 압축해서 정지화면에 옮겨놓은 느낌이다. 스기모토의 밀랍인형 같은 피사체와 관객을 응시하는 카메라 렌즈로 인해 굉장히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퍼포먼스 영상을 보니 몸짓이 예사롭지 않아 감탄을 하며 봤는데, 역시나 발레를 하셨다고 한다. 전지현의 휘슬러 광고에도 등장하신다고.
흥미로운 작품도 있었지만 썩 만족스러운 전시는 아니었다.
서울미술관에 대해 비판적으로 쓴 것은 좋은 요소를 너무 많이 갖추고 있기에 오는 아쉬움 때문이다. 관람객이 찾기에 석파정이라는 공간-비록 당일에 오픈을 하지 않아 가보진 못했지만-은 큰 매력요소일 듯 하고 부암동이라는 동네가 가지는 이미지와 그에 맞는 주변 환경이 문화생활을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또한 내부 공간이나 동선도 나쁘지 않다. 곧 새로운 전시가 오픈하면 다시 찾아올 예정.
전시 관람 후 부암동을 산책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셀카봉이 덕분에 재밌는 사진도 많이 찍고, 어렵사리 찾은 ‘산책'이라는 카페는 우연히 들른 것 치고는 모두 마음에 쏙 들만큼 좋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의 만남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커피를 마시면서 미술에 대해, 서로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던 시간이다. 전시와 미술에 대한 그들의 솔직한 생각을 들으며 마음이 넉넉하게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예술은 차에 치이는 아이를 구할 수는 없지만 구하는 마음을 먹도록 만들 수는 있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반복적인 것들에서 벗어나 예술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생각을 나누는 일은 분명 나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한다. 네 번째 만남에 시간을 내어 참석해주신 분께 정말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이들의 밝은 표정에 또 다음 만남이 기다려진다.